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뉴 May 08. 2023

어느 폐지 줍는 노인의 하루

해가 뜨기 전 금자 씨는 집을 나선다. 자신과 한 몸이 되어버린 낡은 손수레를 끌고.

금자 씨에게는 연락이 뜸해진 세 자녀가 있다. 바람기 많고 폭력적이었던 남편에 시달리면서도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며 꿋꿋이 버텨왔던 그녀였지만, 늙은 몸을 자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금자 씨에게도 장성한 자녀들에게도 생은 녹록지 않다. 그녀는 다만, 자녀들이 스스로의 삶을 잘 버텨나가 주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도 금자 씨는 어제와 같은 길을 걷는다. 굳은살이 배긴 거친 손과 휘어진 나뭇가지 같은 두 다리로 수레의 무게를 꿋꿋이 지탱한다. 추워진 날씨에 수레 손잡이가 얼어붙은 듯 냉기가 전해진다. 장갑을 껴도 손이 시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금자 씨가 겨우 수레 하나 빠져나갈 법한 좁은 골목길을 지나 오래된 다세대주택이 밀집된 곳으로 향한다. 골목길 이곳저곳 간밤 누군가의 토사물이 눌어붙은 자국들이 보인다. 그녀가 수레를 조심스럽게 끌며 지나가자 오물이 수레바퀴에 상처 같은 흔적을 드문드문 남긴다.



골목길을 벗어나 더 너른 길로 들어서자 금자 씨의 먼발치에 파란 카트를 끌고 있는 한 노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금자 씨가 초조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곳에도 엄연히 경쟁의 계급체계는 존재한다. 같은 여자라도 걷는 속도가 더 빠른 자가, 여자보다는 힘 있는 남자가 우위를 점하는 이곳. 그러나 누구보다 금자 씨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은 오토바이에 카트를 매달고 다니는 이들이다. 그들과 맞닥뜨리면 금자 씨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곤 한다. 그녀에게 삶은 늘 공평하지 않았다.

주택가에 들어서자 쓰레기 봉지를 뒤적이고 있는 배고픈 길고양이들이 보인다. 고양이들이 금자 씨의 수레 소리에 놀라 달아난다.


  - 아이고, 도망 안 가도 돼야~


금자 씨가 부러 밝은 목소리로 달음질치는 고양이들을 향해 말을 건넨다. 그 순간, 청년 하나가 금자 씨 근처에 책 꾸러미와 상자들을 털썩, 내려놓고 간다. 책을 본 금자 씨의 눈이 반가움으로 커진다.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금자 씨와 청년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그녀를 보는 듯 마는 듯하는 청년과 달리 금자 씨는 미소 지으며 말한다.


  - 고마워요, 총각!


청년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흘깃 쳐다본다. 이내 뒤돌아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금자 씨는 한동안 바라본다. 첫째 손주도 지금쯤이면 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보지 못한 지 몇 해는 더 된 손주의 모습을 떠올리는 금자 씨의 마음이 쓸쓸해진다.

청년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금자 씨는 땅 위에 흩어져있는 상자들을 하나씩 정성스럽게 펼치고 접어 수레에 싣는다. 하나, 둘, 수레 위로 상자가 오를 때마다 수레를 버티고 있는 그녀의 손과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조금씩 걸음이 느려진다. 그럼에도 금자 씨는 우직하게 나아갈 뿐이다. 자신이 가는 길이 평지임을 감사하며, 남들이 30분이면 돌 동네 한 바퀴를 몇 시간에 걸쳐 걷고 또 걷는다.



이제 금자 씨는 동네 마트로, 시장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쩌면 오늘은 조금 일찍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오랜 세월 집안의 실질적 가장 역할을 하며 고된 걸음에 익숙한 그녀지만, 칠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온 두 다리는 점점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을 갈구한다.

점심시간이 지나자 주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녀에게 점심 먹을 틈은 '사치'와도 같다. 혹여 잠시라도 한눈을 팔다가는 누가 그녀의 수레를 훔쳐갈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전에 경로당 김 씨도 방심한 사이 종이가 가득 담긴 수레를 도둑맞았다고 했다. 그녀는 골목 한편에 세워 둔 수레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집에서 싸 온, 식은 주먹밥을 꺼내든다. 그제야 그녀는 물 한 모금을 삼키고 참아왔던 갈증을 달래며 잠깐의 휴식을 누린다.


 - 어르신, 오늘은 폐지 없어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그녀를 앞질러 다녀간 모양이다. 금자 씨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오후가 되면 폐지가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그래도 금자 씨는 오늘만큼은 상심하지 않으려 한다. 오늘 그녀의 수레에는 희망과도 같은 헌책들이 실려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그녀는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금자 씨는 오늘 김 씨가 알려준 ‘새로운 고물상’으로 가볼 참이다. 김 씨가 ‘킬로에 십 원’은 더 쳐준다고 한 그곳으로.


  - 거기는 너무 멀어야~


김 씨 앞에서 금자 씨는 이렇게 말했더랬다. 그러나 금자 씨는 얼어붙은 발을 이끌고 기어이 수레와 함께 낯선 길로 들어선다. 한 걸음 한 걸음, 이젠 자신의 몸무게를 훌쩍 넘어버린 수레를 끌고. 수레의 무게로 인해 금자 씨의 허리가 자꾸만 앞으로 굽는다. 그런 금자 씨 곁을 배달 오토바이가 무서운 속도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놀라 길 가장자리로 물러나는 금자 씨의 머릿속에 문득 얼마 전에 사고로 죽은 박 씨가 떠오른다.

 

  '박 씨의 어린 손주들은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보상금은 제대로 받았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금자 씨의 눈앞으로 과속방지턱이 나타난다. 금자 씨가 잔뜩 긴장하며 남은 힘을 다해 방지턱을 오르고, 내린다. 마치 그 옛날 고개를 넘듯이. 그리고 얼마 후, 다행히도 금자 씨는 무사히 김 씨가 알려준 고물상에 도착한다. 역시,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다.

몸무게의 몇 배나 되는 폐지들을 고물상에 덜어 내고 그녀가 손에 거머쥔 건 오천 원이 채 되지 않는 돈과 요구르트 한 병이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라고 금자 씨는 생각하며 수레에 남아있는 헌책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하루를 마친 금자 씨가 절뚝이는 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오늘도 커피 한 잔 값은 벌었기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는 마음으로. 짧아진 해는 산 아래로 넘어간 지 이미 오래다. 금자 씨는 별빛이 드문드문 비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마시지도 않는 커피 한 잔을 마음속으로 그려본다. 카페 앞을 지날 때면 스며 나오는 커피 향에 잠시 멈추어 선다. 그제야 굽었던 그녀의 허리가 조금 펴진다.



금자 씨는, 폐지를 줍지 못할 만큼 육신이 사그라들면 힘들게 모은 돈으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오래전부터 눈여겨봐 두었던 그녀의 목적지. 어쩌면 그녀의 마지막 욕심일지도 모를 그곳, 이따금 커피 한 잔을 마실 수도 있을 그곳을.

하루를 마감한 금자 씨가 주머니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낸다. 고단한 일과 끝, 그녀에게 안식을 주는 그곳이 그녀의 손안에 들어온다. 사진 속 하얀 건물 위에 붙어있는 간판이 보인다. 수백 번은 더 봤을 그 이름,


  '에 덴  요 양 원'.


사진을 보며 금자 씨는 생각한다. 어쩌면 이곳이 자신에게 남은 가장 큰 '호사'일 거라고. 자식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그 시간만큼은 꼭 누리고 가고 싶다고.

금자 씨는 오늘도 소망해 본다. 언젠가, 그곳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평범한 집 첫째 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