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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Oct 16. 2023

빛멍 때리는 휴일 오후

행복은 빛의 조각처럼

물멍, 불멍, 하늘멍 등 수많은 '멍'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빛멍'이다. 그것도 오후에서 저녁으로 기울어가는 시간 거실에 비쳐드는 햇빛에 시선을 푹 담그는 '멍'.



본디 나는 햇빛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 짝꿍이 블라인드를 올릴라 치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더 내려!'라고 외쳐대기 일쑤인 데다, 집안 조명마저 짝꿍이 좋아하는 환한 백색등보다는 은은하게 퍼지는 오렌지빛을 선호한다. 이렇듯 빛에 관한 취향만큼은 나와 짝꿍은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이런 나도 반기는 햇빛이 있다. 정점을 향해 올라가는 강렬한 아침 햇살이 아닌, 밝고 따뜻한 하루를 아낌없이 세상에 내어주고 노을을 향해 천천히 소멸해 가는 은은한 오후의 햇빛. 눈이 부셔 제대로 바라보려면 눈살을 찌푸려야만 하는 빛이 아닌, 내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시선을 담글 수 있는, 그리하여 마음까지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는 빛.



요즘 우리 집에선 하루 중 오후 4시에서 5시로 향해 가는 시간 이러한 빛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휴일 오후에 느긋하게 앉아 빛멍을 때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만큼은 쭈니가 '타닥타닥' 두드리는 컴퓨터 자판 소리가 소음이 아닌, 흡사 모닥불이 리드미컬하게 타 들어가는 ASMR처럼 들린다.

잔잔하게 틀어 놓은 모차르트의 선율은 빛의 조각들과 어우러져 평일 집에서는 보기 힘든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해 낸다. 빛이 비쳐드는 거실 한켠은 빛을 위한 훌륭한 무대가 되어준다. 나는 맞은편 거실 소파에 앉아 빛이 보여주는 놀라운 움직임을 감상하는 성실한 관객이 된다.



일상의 매너리즘에 빠지다 보면 집이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놓쳐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잠시 일상을 제쳐두고 마음을 열면 평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같은 공간이지만 더 이상 같은 공간이 아닌 것 같은 신비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집안 곳곳의 물건들이 품고 있는 이야기들이, 빛이 물건들에 쏘아주는 '자연의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머릿속에서 다채롭게 펼쳐진다. 나는 마치 물건들이 내게 말을 건네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좌로부터) 10분 간격으로 빛이 움직여 간 거리

오후 4시 15분. 빛이 선우예권의 '모차르트 연주 앨범'을 살포시 비춘다.

오후의 빛과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음악이 있을까. 선우예권이 들려주는 모차르트는 어느 연주자보다 소박하고 절절하면서도 섬세한 울림을 준다. 거기엔 아마도 선우예권이란 피아니스트가 지난 서사가 한몫할 것이다. 경제적 궁핍함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콩쿠르를 마다하지 않았던, 그래서 웃프게도 '콩쿠르 왕'이라고 불렸던 선우예권의 지난 과거가, 모차르트가 선사하는 음표 하나하나에 알알이 입혀져 내게 전해져 온다.



오후 4시 24분. 빛이 '야마*' 피아노로 흘러간다.

보시다시피 이 녀석은 디지털 피아노다. 10여 년 전쯤 짝꿍이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다고 해서 소박하게 구입한 것이다. 그때 당시 나는 첫째를 돌보기 위해 육아휴직 중이었고, 짝꿍은 이직을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수험 공부에 매달려 있던 상황이었다. '근로장려금'을 받을 만큼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서적으로는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나는 기억한다. 체르니 40번의 20번까지 배웠던 기억을 되살려 내가 짝꿍의 피아노 개인 교사가 되어주겠다며 나섰다. 온전히 순수한 의도는 아니었고, 학원비를 아끼기 위한 목적이 다분히 깔려 있었다. 짝꿍은 내 지도 편달 하에 바이엘 상권을 떼고 하권의 어디메쯤에서 멈췄다.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힘겹게 움직이며 어렸을 적 소망을 이루기 위해 피아노 건반 앞에서, 첫걸음마를 하는 아이처럼, 최선을 다하던 짝꿍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후 4시 37분. 빛은 바야흐로 피아노 구석에 놓여 있는 '바이올린'에 가 닿는다.

내가 바이올린을 처음 배웠던 건 20대 초반이었다. 그때만 해도 집 근처에 성인을 상대로 바이올린 교습을 해주는 곳이 없었기에 나는 바이올린을 맨 채,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가서 강습을 받았다. 그렇게 힘겹게 오가며 연습을 했지만 나는 동요 '나비야'를 배운 후 눈물을 삼키며 바이올린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바이올린 연주에 눈곱만큼의 재능은 고사하고, 너무 작고 귀여운(?) 손 덕분에 '나비야' 이상의 연주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혈기 넘치던 의지와는 다르게 '악기 연주에' 저주받은 신체를 한탄하며 나는 그 길로 바이올린을 중고 가게에 넘겼다. (이런 내 손은 집안일하는데, 특히 설거지할 때, 빛을 발한다. 입구 좁은 웬만한 물병들에도 팔목까지 쏙 들어가기 때문에 구석구석 세심하고 완벽한 세척이 가능하다. 예술에 가까워지고 싶지만 일상에 특화되어 있는 내 손이란!ㅠ).



그렇게 억울하게 '한'으로 남았던 바이올린을 향한 나의 열정은 내 딸램을 통해 풀어지는가 싶었지만, 딸램도 결국 동요 연주를 하다 바이올린을 그만두었다. 정확한 곡명은 기억나질 않지만, 어쨌든 '나비야' 보다는 진일보한 작품이었으니 그것으로 위안 삼고 있다.

지금 피아노 위에 놓여 있는 바이올린은 5-7세 아이들이 입문용으로 사용하는 1/8 크기의, 그야말로 장식용 바이올린이다. 천추의 한으로 남은 내 바이올린의 역사는 이렇게 빛멍과 함께 바이올린을 애틋하게 지켜보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후 5시가 넘어가자 빛이 거실 밖을 넘어 하늘로 향해 저물어 간다.

빛이 내게 선사한 3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나의 집은 빛과 함께 천천히 흐르는 명상의 공간이 되어주었다. 도망치듯 달아나 호캉스를 즐기러 가게 만드는 그런 집이 아닌, 추억의 이야기와 함께 내 마음에 평온한 온기를 얹어주는 친구 같은 존재로 탈바꿈했다.

저무는 해를 보며 다시금 생각한다. 결국 행복은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날마다 빛이 드리우는 조각들처럼 집안 곳곳에 함께 머물러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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