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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an 22. 2024

우리의 동거는 계속될 수 있을까?

엄마가 길을 가다 또 넘어졌다.

작년 겨울 이맘때쯤 집 근처에서 넘어진 이후 두 번째다. 사태가 이러하다 보니, 이제 겨울이 되면, 엄마가 잠시라도 외출을 할 때면, 불안한 마음이 될 것 같다. 어린 시절 현관을 나서는 내 등 뒤에 대고, '길 조심하라'라고 반복하던 엄마의 그 말이 불편한 간섭처럼 들렸는데, 이제는 내가 엄마의 등을 보며 연신 잔소리를 해대야 할 판이다.



사실, '집 앞에서 넘어졌다'며 잔뜩 부어오른 광대를 조심스럽게 내보이던 엄마를 마주하기 직전까지, 이제 더 이상은 엄마와의 동거를 이어가기 힘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초조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감시하는 엄마를, 아이들과 우리 부부에게 웃음을 주는 반려조들을 업신여기는 엄마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하호호' 즐겁게 있다가도, 그런 즐거운 마음이 고조되려 하면, 엄마가 치고 들어와 나를 붙잡고 저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느낌이 들곤 했다. 속 끓이던 아빠가 가고 나니, 애간장 태우는 엄마가 내게로 온 것 같아, 때론 울적하고 또 때로는 화가 솟구쳤다.



지난 겨울에 엄마가 넘어졌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컸는데, 이번에는 더 크게 다쳤음에도 엄마를 마구 야단쳐주고 싶었다. 직전에 엄마와 반려조를 두고 큰 갈등이 있기도 했고, 평소에 억지로 산책이라도 하며 다리 힘을 키우라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다가 이 사태를 일으킨 엄마가 얄미워 보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우산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가 봉변을 당했다. 엄마에게 그 우산은 비를 막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지팡이를 대체하기 위한 도구였다. 엄마는 최근 내가 모르는 사이 집안에서 몇 번 '그냥' 넘어졌다고 했다. 웬일로 추운 겨울날 산책을 나섰나 했더니, 실내에서 넘어진 일로 위기감을 느낀 엄마가 조금이라도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또다시, 눈길에 미끄러져서도 어디 부딪쳐서도 아니고, 다리에 힘이 없어서 구순도 훌쩍 넘은 노인처럼 그냥 고꾸라진 거였다. 그것도 집을 코앞에 두고, 우산 따위가 지탱해 줄 만한 상황이 아닐 정도로 '쾅'하고 넘어졌고, 이번에는 근처에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도 엄마는 잠시 그 자리에 하늘을 향한 채로 누워있었으리라.


  "이제 엄마도, 그 나이에, 거동 불편한 할머니들이 끌고 다니는 그, 유모차 같이 생긴 것 가지고 외출해야겠어?!"


이따금 산을 오르다 보면, 70대로 보이는 어르신들도 잘만 산을 타시던데, 집 근처 평지도 멀쩡히 걸어 다니지 못하는 엄마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린아이 데리고 다니듯 손잡고 질질 끌고라도 다녀야 하나, 한숨이 절로 푹푹 나왔다.



점심 즈음 넘어졌다더니, 집에 있던 사위에게는 말 한마디 못하고, 내가 귀가한 저녁 시간까지 꼼짝없이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를 데리고 병원 진료 후 돌아서던 길,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눈물 한 방울이 찔끔 솟아 나왔다. 이번에는 정말로 각자의 길을 가려했는데, 이제는 나도 좀 홀가분하게 살아보고 싶었는데, 눈두덩이가 밤탱이가 된 엄마를 차에 태우며, '내게 그건 꿈같은 것'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언젠가, ‘너희에게 짐이 되는 건 아닐까?'라고 말하던 엄마 앞에서, '엄마가 잘 있어주는 것만 해도 좋은 일이지'라고 대답했었는데, 그건 정말 내 진심이었을까, 나 자신조차 의심스러웠다.



엄마가, 자신이 납득할 만한 반려동물인 '개' 대신, 이상하다고 여기는 '새'를 키우는 우리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땐 나도 엄마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된다. 엄마에게 새들이 그저 '똥이나 싸대고 사람 물기나 하는 머리 나쁜 동물'인 것처럼, 그래서 새들을 앞에 두고 '때려죽이고 싶다'며, 생전의 독기 오른 아빠의 얼굴을 하고 거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낼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엄마를 나도 이해하기는커녕 밀어내고 싶어진다. 그러다 이내, 쭈글쭈글해진 얼굴로 생을 다해가는 노인의 발걸음을 하고 있는 엄마를 보면, 엄마에게 아빠가 전생의 '업보’처럼 느껴졌던 것처럼, 내게는 엄마가 그러한 존재인가 싶어져 인생이란 녀석에게 '참 짓궂다' 타박하고 싶어진다.



그럴 때면, ‘아빠가 가니, 엄마가 온 것 같다'는 생각에, 그제야 세상을 등진 아빠를 떠올린다. 그리운 마음이면 좋았으련만, 또다시 원망으로 가득한, 가시 돋친 마음으로 말이다.


이 겨울이 얼른 지나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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