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영 기간: 2011.1.30. ~ 2011. 3.20.(총 8부작, ‘드라마스페셜’ 연작 시리즈)
* 방영 채널: KBS2
* 장르: 추리, 스릴러
* 주연: 김상경, 김영광, 김우빈, 곽정욱, 성준, 이솜, 이수혁, 이엘, 정석원, 백성현, 홍종현
* 주 시청 경로: 본방 + IPtv
몇 해 전, 한 독서 모임에서 진행한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추리클럽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대기에 겨울의 추위가 스며들기 시작한 11월 말의 밤, 골방과도 같은 자그마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북클럽이었다. 열 명 남짓한 추리 소설 마니아들의 열정적 대화가 오가던 그 작은 공간은, 밀실 추리의 대표작인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곱씹어보기에 최적의 장소였고, 분위기에 신나게 빠져 든 참석자들의 열기로, 추위를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두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가지를 뻗고 뻗어 해외 좀비물로 이어졌고, 급기야 오래전 국내에서 방영한 한 드라마로까지 나아갔다. 밀실 추리 스릴러를 다룬 드라마였는데, 누군가 이 드라마를 언급하자 여기저기서 반가움의 탄성이 들렸고, 뒤이어 드라마와 관련된 각종 정보와 소회가 폭죽들처럼 연이어 터져 나왔다. 거기에 있었던 다수가 드라마를 흥미롭게 감상한 탓이었으리라. 그 작품이 바로,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드라마 <화이트 크리스마스>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단편극 위주인 KBS '드라마스페셜' 제작팀이 새롭게 도전한 연작 시리즈의 하나로, 총 8부작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원래는 16부로 기획되었다고 한다)
드라마 대본을 맡은 박연선 작가의 말처럼, 스웨덴의 대표적 공포영화 <렛미인>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드라마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눈'의 이미지가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그러나 새하얀 눈은 아름다움과 낭만을 더해주는 것이 아닌, 고립을 극대화시키는 도구이자 희생자의 피를 더 선연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섬뜩한 배경으로 기능한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북유럽 특유의 초자연적인 느낌에 더해지는, '고요함 속에서 고조되는 긴장감과 공포'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여기에, 폭설에 갇힌 학교가 거대한 밀실의 역할을 하며, <렛미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조화롭게 엮어놓은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개인적인 느낌을 좀 더 보태자면, 이 작품은, 덴마크의 추리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는 내용과, 강렬한 눈의 이미지 안에서 펼쳐지는 밀실 스릴러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눈으로 인해 밀실이 되어버린 '수신고'라는 학교 공간은, 폭설에 갇힌 <쥐덫>의 몽스웰 여관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에서 밀실 역할을 하는, 바다에 둘러싸인 섬과도 같다. 이곳에 낯선 이가 들어선다. 그와 동시에, 주인공들이 받은 섬뜩하고 기묘한 편지의 내용이 수면 위로 드러나며, '괴물과 싸우기 위해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가는 주인공들의 8일간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학교 내 인물 중 한 명은 괴물이 되어버린 연쇄살인마, 나머지는 그를 피해 다녀야 하는 도망자 신세다. 그러나 피할 곳은, 이제는 공포스러운 공간이 되어버린 기숙형 학교가 전부다. 끝없는 눈더미에 파묻힌 학교 밖은 더 이상 탈출을 위한 곳이 되어주지 못한다. 학교 안에 갇힌 이들은, 괴물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해야만 한다. 서로가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언제, 어떻게 목숨을 빼앗길지 알 수 없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말이다. 드라마의 중반부, 드디어 괴물의 정체가 드러나며 괴물과, 살아남기 위한 나머지 인물들 사이에 치열한 두뇌 싸움이 시작된다.
드라마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속도감 있는 긴박함은 없다. 고요하지만, 숨 막히도록 잔인하게 흘러가는 하루하루 속에서 어느 날 급작스러운 살인이 발생하고, 이는 살아남은 주인공들에게 견디기 힘들 만큼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킨다.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공포는, 주인공들의 체내에 차곡차곡 쌓여 끝내 목숨을 앗아가는 치명적인 독과도 같다. 인재들만 모여 있다는 이곳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괴물이 행하는 밀실 실험은, 시청자들에게 과연 괴물은 태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하는 일상에서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을 던진다.
카스트라토의 노래가 음울하게 울려 퍼지던 8일이 지나가고 마침내, 그리고 역시나, 한 학생의 신고 전화를 받았던 경찰이 뒤늦게 등장한다. 경찰과 함께 학교로 몰려온 학부모들은, 학생들을 인질로 잡고 있는 연쇄살인범에게서 자식들을 구해내고자, 그간 자신들이 지은 온갖 죄를,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죄를 지었을 살인범에게 마치 고해성사하듯 토해낸다. '이 세상에 죄인 아닌 자는 없다'라는 자신만의 전제를 확실히 증명했다는 듯 살인범은 이 상황을 즐긴다. 아니,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과 같은 '끔찍한 괴물'을 탄생시키고자 무던히도 애쓴다. 이쯤 되면, 살인범이 만들어가는 상황은 단순한 실험이 아닌 강력한 신념의 발로처럼 보인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통해 시청자들은, 가스라이팅을 당한 피해자가 초래하는 섬뜩한 결과를 관찰자의 입장에서 숨 죽이며 지켜보게 된다. 아웃사이더였던 학교의 문제아가 문제 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아이러니를 목격하며, 삶에서 우리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음을 되새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모든 과정을 엿보는 우리 자신은 과연 '괴물'로부터 자유로운지를, 화려한 명문대 진학률을 자랑하는 사립학교의 모범생들이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천착해 보게 된다.
드라마의 마지막, 괴물이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우리에게 질문한다.
괴물은 태어나는 것일까, 만들어지는 것일까?
대답이 둘 중 어느 것이든, 죄에 대한 책임을 과연 누구에게 물을 수 있는 것일까, 작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시청자들에게 화두를 던진다.
"내가 이겼어..."죽음을 앞둔 괴물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마지막으로 내뱉은 이 말을 떠올리며 시청자들은 고민에 빠져들게 된다. 괴물의 말대로 또 다른 괴물들이 그로 인해서 탄생된 것일까, 아니면 그들은 또 다른 괴물이 아닌, 그저 가여운 피해자일 뿐인가.
해답은 결국, 드라마를 끝까지 함께 해 온 시청자들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 드라마 <화이트 크리스마스>와 어울리는 추천 소설 =
* 국내 초판 발행: 2018년 8월
* 장르: 추리, 스릴러(총 428쪽)
* 작가: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 출판사: 황소자리
겨울만큼 스릴러물과 어울리는 계절이 있을까? 내게는 그중에서도 특히, 우리가 흔히 접하지 못하는 북유럽의 스릴러물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여기에서는, 전 국민의 10분의 1이 한 권 이상의 책을 출간한 출간 작가라는 '아이슬란드'의 스릴러물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어쩐지 무릎담요를 한 채 벽난로를 앞에 두고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의 제목은 <아무도 원하지 않은>이다. 영미권 스릴러와는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하는 이 작품은, 잔잔한 것 같으면서도 불시에 느껴지는 심리적 긴박감이 다음 장을 넘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든다.
북유럽 특유의 복잡한 이름을 가진 작가만큼이나 표지가 인상적이다. 새하얀 눈밭 위, 길 끝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침엽수립 사이에 스산하게 서 있는, 어둠에 잠긴 창고 건물. 그곳을 향해 나 있는 알 수 없는 이의 발자국.. 북유럽의 정취를, 이 소설의 분위기를 이보다 더 잘 전해 줄 수 있는 표지는 없을 것 같다.
귀신도, 스릴러에 곧잘 등장하는 그 흔한 연쇄살인범 하나 없지만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선명히 드러나는 '악'은 아니지만, 그림자 뒤에 숨어서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 촘촘한 묘사 중간중간 불현듯 등장하는 서늘한 여백에, 누군가가 내 뒤통수를 노려보고 서 있는 듯한 '적막한 공포감'이 엄습한다. 내 두려움의 급소를 툭, 하고 건드리는데, 그 순간의 감정이 머릿속에서 마치 새벽 선사의 풍경소리처럼 은은하지만, 강렬하게 퍼져나가는 듯하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폭설, 눈보라의 이미지와 함께,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의문의 죽음이 낯설고도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는, 40년 전 '소년 보호소'에서 벌어진 두 소년의 사망 사건이 현재의 사건들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관이 되는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들을 통해, 이야기의 끝까지 독자들이 차마 안도하지 못하도록 탱탱한 긴장감으로 끌어나간다.
스릴러물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개인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는 묘사들도 인상적이다.
홀로 남은 회사 사무실 책상 아래로 숨어드는 그림자, 열린 창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부풀어 올랐다 꺼진 커튼 아래 아이 하나가 서 있는 듯한 부피감이 남은 공간, 등뒤 너머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누군가 조용히 세고 있는 듯한 느낌, 깊은 밤 마당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 곁에 멈춰 있는 검은 그림자, 같은 표현들을 접하며, 달빛마저 으스스한, 밤 깊은 시골 북유럽의 외딴 농가 한가운데에 내가 들어서있는 듯 모골이 송연해진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오래전 봤던 영화 한 편을 떠올렸다. 그 영화를 보며 느꼈던 섬뜩함이 이 책을 통해 다시 소환되었다. 영화의 제목은 <오멘>. 그와 동시에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은>이라는 책 제목 뒤에 이어질 마지막 한 단어가 무엇인지를. 또한, 왜 깊은 밤 홀로 이 책을 절대 읽지 말라고 하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