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남주의 ooooo이었다
시대의 흥행작인 영화 <타이타닉>과 <터미네이터 2>를 보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두 작품은 내용에 관한 것보다는 이 작품들에서 개인적으로 문제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어찌 보면 다소 잡스러운 지점을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가 여기에서 지적하는 부분은 아마도 여성 독자들에게 더 설득력 있게 들릴 것이다. 여성 관객의 입장에서 보고 느낀 점들을 기반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 독자들은 이 글을 그저 가볍게 훑으며, 어떤 여자사람 관객은 이 두 영화를 다소 희한한 관점으로 감상했구나, 그저 웃어넘겨도 좋겠다.
영화 <타이타닉>으로 말하자면, 아빠 생전에 우리 가족이 극장에서 함께 보았던 유일한 영화이자, 내가 극장 3차 관람을 한 전무후무한 작품이다. 당시, 디카프리오의 인기는 '우주대스타'급이었다. 바즈루어만 감독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역으로 '미소년 스타'로 등극한 그는, <타이타닉>이라는 거대 상업영화를 통해 상업성을 겸비한 글로벌슈퍼스타로 훌쩍 발돋움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어항씬으로 뭇 소녀들의 가슴을 들었다 놨다 한 소년은 청년이 되어 타이타닉 3등 칸의 자유로운 영혼, '잭 도슨'을 완벽하게 연기해 내며 뭇여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가장 유명한, 잭이 로즈의 팔을 붙잡고 세상 밖으로 함께 날아갈 듯한 자세로 "나는 이 세상의 왕이다!"라고 외치던 뱃머리 씬도, 차디찬 대서양에서 얼어붙어가는 마지막 숨을 겨우 내쉬면서도 로즈를 향한 걱정과 사랑을 내려놓지 않던 가슴 사무치던 장면도 인상 깊었지만, 개인적으로 <타이타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잭이 전라의 로즈를 스케치하는 아래의 장면이었다.
이제껏 극장에서 여성 관객들이 단체로 내지르는 탄성을 들은 적이 딱 두 번 있다. 첫 번째가 바로 위의 첫 번째 사진에 있는 장면이 극장 화면을 스쳐 지나갔을 때다.(두 번째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당시 인기 절정의 배우 권상우의 복근씬이 등장했던 순간이다.)
여성 관객들은 디카프리오가 등장한 <타이타닉>의 수많은 장면들 중, 굳이, 이 지점에서 감탄사를 토해냈다. (약속한 듯 동시에 터진 감탄사 뒤로 멋쩍은 웃음소리들이 이어졌다) 전라의 로즈를 쑥스러우면서도 진지한 표정으로 스케치하기 시작하는 잭의 눈빛이, 몇 가닥 내려온 금발의 머리 아래로 살포시 클로즈업되어 드러났을 때, 관객석에서 일제히 탄성이 흘러나왔다. 약 1,2초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충격 여파가 예사롭지 않음을 술렁이는 관객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물론, 한창 미모 절정이었던 디카프리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였다. 나는 한동안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다 아하, 하며 다음의 장면을 떠올렸다.
아래는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이다. 그 유명한 어항씬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 영화 초반부에 로미오가 소개되는 지점인데, 주인공인 로미오가 반항적이고도 강렬한 눈빛으로 옆으로 슬쩍 시선을 돌리는 컷이다. 이 장면도 아주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데, 여성 관객의 입장에서는 심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독자분은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챘을 것이다.
그랬다. 문제는 남주의 헤어스타일이었다.
자유분방하고, 때로는 우수에 차 있으며, 또 때로는 반항적인 분위기를 품고서, 찰랑찰랑 내려와 남주의 눈을 아스라이 드리워주는 그 머리말이다. 그리하여 남주의 눈빛에 깊은 풍미를 더해주는 듯한, 낭만 가득한 머리스타일. 만약 위의 장면들에서 디카프리오가 '올백'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면 과연 여성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을까? 나는 그렇지 않았으리라고 확신한다. 자, <타이타닉>에서 다른 머리 스타일로 등장한 아래의 디카프리오를 보시라.
확연히 다른 느낌이지 않은가? 물론 잘생긴 원판은 어디 가지 않았으나, 예의 그 '분위기'라는 것이 없다. 머리스타일이 주는, 감성을 건드리는 분위기 말이다. 이쯤에서 <터미네이터 2>를 언급해야겠다. 로봇이 등장하는 SF 공상과학 영화이지만, 나는 이 작품에서도 남주의 헤어스타일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터미네이터 2>에는 세 명의 주연 남자 배우가 등장한다. 터미네이터 역의 '아놀드 슈왈제네거', T-1000 역의 '로버트 패트릭', 그리고 어린 존 코너 역의 '에드워드 펄롱'. 터미네이터와 T-1000은 로봇답게 머리마저도 각지고 짧은 헤어스타일이다. 표정도 말투도 모습도 로봇 그 자체여서 여성 관객들의 마음이 당최 움직이지 않는 캐릭터다. 그러나 우리에겐 존 코너가 있었다. <타이타닉>의 잭 도슨만큼이나 한 번 만져보고 싶은 머릿결을 자랑하던. 잭처럼 금발은 아니었지만, 갈색의 긴 머리가 반항기 넘치는 존의 이마 위로 흘러 내려올 때, 소녀들의 가슴은 바람결에 흔들리는 소년의 머리칼처럼 설레었다. 거기에 햇빛이라도 비쳐 들면, 펄롱의 오묘한 눈의 빛깔과 어우러져 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여기에서, 에드워드 펄롱의 캐스팅과 관련된 일화를 잠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터미네이터 2>의 캐스팅 디렉터였던 '말리 핀'은 존 코너를 연기할 아역 배우를 캐스팅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보호본능을 자극하면서도 / 세상 물정을 잘 알 것 같고 /반항적이고 터프한 느낌의 아역 배우를 요구했지만, 말리 핀은 기존의 아역배우 중에는 그런 인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왜 아니겠는가?) 그녀는 결국 미국 전역을 돌며 감독이 원하는 이미지에 어울릴 법한 소년을 찾아다녔고, 어느 날 야외 수영장 벽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에드워드 펄롱을 발견한 순간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을 집요하게 지켜보는 말리 핀의 시선에 펄롱은 불쾌감마저 느낄 정도였다고 하니, 그녀가 그 순간 얼마나 펄롱에게 마음을 뺏겼는지 알 수 있다. 아마도 그녀는 '드디어 찾았다!'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으리라. 저 얼굴에, 저런 머리를 하고, 심지어 아이들이 왁자지껄 뛰어노는 야외 수영장에서 홀로 책을 읽는 소년이라니! 나는 펄롱을 지켜보던 그녀의 마음에 격하게 공감할 수밖에 없다.
말리 핀은 소년 펄롱에게서 느껴지는 '퇴폐미'가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소년에게서 퇴폐미를 보았다니 어불성설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터미네이터 2>의 존 코너를 유심히 본 관객들은 납득이 될 것이다. 아이 답지 않은 퇴폐미가 분명 그의 눈빛과 표정에는 담겨있다. 아마도 그의 불행한 성장 과정이 투영된 것이리라. 나는 캐스팅 디렉터의 마음을 움직인 펄롱의 '미'에 그의 머리스타일이 한몫했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사실은, 짧은 머리로 분연했던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속의 펄롱과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워낙에 인물이 출중했던 펄롱이라 머리 따위 어떻든 다 좋아 보인다면, 아래 사진을 한 번 보시라. 현재 인터넷상에서 검색할 수 있는, 디카프리오와 펄롱이 함께 찍은 거의 유일한 사진이다. 아마도 90년대 중후반의 어느 시점, 둘 다 리즈 시절이었을 때일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디카프리오의 미모가 펄롱에게 밀리는 듯한 모습이다. 그것도 제법 큰 차이로. 난 그 이유가 디카프리오의 머리 스타일에 있다고 본다. 왜냐면 디카프리오가, 분위기 있게 옆으로 살짝 젖혀진, '쉼표형 머리'가 아닌, '더벅머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고 보니, 90년대 멋진 오빠들의 머리 스타일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시절 한창 잘 나가던 국내 남자 청춘스타들의 머리 스타일을 살펴봐도, 위 두 배우와 비슷한 결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예쁘고 잘 생긴 사람은 드물지 않지만, 분위기 있게 생긴 사람은 흔하지 않다.
남성들이 긴 생머리 여성에 대한 로망이 있는 것처럼, 그 시절 여성들에게는 긴 머리 오빠들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그렇기에, 흥미로운 영화 속 잘 생긴 남주가 한 '드리워진 머리'는 영화의 주요 관객층인 젊은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영화가 흥행가도를 질주하도록 속도를 가하고, 오래도록 관객들의 마음에 아련한 잔상으로 남아, 희대의 명작으로 남도록 하는데 한몫을 했다.
다름 아닌, 남주의 저 '긴 쉼표머리'가 말이다.
다음 주에 올릴, 정기 연재의 마지막 회차에서 소개할 작품은, 강남개발 역사를 담고 있는 대하드라마 <자이언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