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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an 19. 2024

이런 사극 또 없나요? <공주의 남자>

* 방영 기간: 2011.7.20. ~ 2011.10.6.(총 24부작)

* 방영 채널: KBS2

* 장르: (팩션) 사극

* 주 시청 경로: 거실 TV로 본방 사수


때때로 정사(正史)나 야사(野史) 속에 기록된 한 줄의 문장에서 흥미로운 드라마와 영화가 탄생한다. 작가들의 경이로운 상상력을 통해 펼쳐지는 이야기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설득력 있는 서사를 풀어낸다. 흥행돌풍을 일으켰던 <킹덤>의 김은희 작가도, 조선후기 굶주린 백성들 사이에 돌던 '역병'에 관한 한 줄의 역사적 사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번 주에 소개할 드라마 <공주의 남자>는, 조선후기 문신 서유영이 저술한 <<금계필담>>에 기록된 설화의 한 문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만 <공주의 남자>는, 야사 속에 기록된 김종서의 손자와 수양대군(후일 세조) 딸 사이의 로맨스가 아닌, 김종서(이순재)의 아들 김승유(박시후)와 수양대군(김영철)의 딸 이세령(문채원)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살짝 비틀어보기'를 통해 드라마 서사가 더 흥미로워지도록 한 작가의 영민한 선택이다.

작가는, 인간사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인 남녀 간의 금지된 사랑을, 조선시대 가장 드라마틱한 시대 중 하나였던, 문종-단종-세조로 이어지는 시기에 접목해 애틋하고도 비장한 역사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최근 대세인 웹툰•웹소설 기반의 퓨전사극은, 복식뿐 아니라, 서사나 캐릭터의 무게감이 가벼워 사극으로써의 매력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연기도 어쩐지 '어설픈 현대극'을 보는 듯하다.

<공주의 남자>는 퓨전사극임에도 정통사극에 가까운 캐릭터와 서사를 유지하는 동시에, 주인공들의 사랑을 다루는 장면에서는 정통사극에서 한 발 나아간 모습을 보여준다. 첫 화부터 마지막 화까지 사극으로써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감을 유지한다. 남녀주인공의 사랑이 시작되는 드라마 초반부는 중간중간 마치 로맨스물을 보는 듯 화사한 느낌을 주나, 비극적 상황이 격화되는 극 중반 이후로 갈수록 점차 진지하고 무게감 있으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공주의 남자>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화사한 로맨스도 있다

여자주인공인 세령의 캐릭터는 흡사 영화 <타이타닉>의 로즈(케이트 윈슬렛)를 떠올릴 만큼 자유분방하고 적극적이다. 길을 갈 때도 '장옷'을 둘러싸고 조신히 다녀야 했던 조선시대 양반댁 규수가, 다리에 깊은 상처를 입는 것도, 낙마하는 것도 괘념치 않고, 수차례 말타기에 도전하고 결국 자유로이 바람을 가르며 길을 내달린다. 그런 세령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던 김승유도 결국 그녀에게 마음을 내어주고야 만다.


  
주인공 세령과 승유 사이의 비극은, 둘 사이 사랑의 감정이 더 이상 돌이키기 힘들 정도가 되고서야, 그들이 서로가 맺어질 수 없는 집안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로미와 줄리엣>의 주인공처럼, 그들을 떼어놓으려는 힘이 커질수록 서로를 향한 그들의 마음은 더욱 깊어가고, 그렇기에 이야기는 점점 더 안타깝고 비극적으로 흘러간다. 실제 존재했던 '피의 역사'가, 픽션을 가미한 주인공들의 비운의 삶을 끌어안은 채로 시청자들의 애통한 공감의 마음을 이끌어낸다.

(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 수양대군(김영철), 김종서(이순재), 김승유(박시후), 이세령(문채원)

9화 김종서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수양대군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인 '계유정난'을 묘사한 부분도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공주의 남자>는, 단종(노태엽)이 16세 어린 나이로 애잔하고도 비통한 삶을 마감하기까지, 역사가 처절하게 피로 물들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단종의 친누나이자, 공주에서 후일 관노비로 살게 된 한 많은 경혜공주(홍수현)의 삶과, 단종 복위를 도모했다는 죄명으로 거열형에 처해져 최후를 맞이했던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이민우)의 서사 또한 함께 담고 있다.



남녀 주인공을 맡은 박시후와 문채원은, 이제껏 내가 본 사극 배우들 중 한복이 가장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 커플이었다. 고운 자태의 한복에 어우러진, 사극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대사는, 두 주인공에게 배우로서의 매력을 더해주었다.

극 중 등장하는 독특한 메인 테마도 극의 서사와 잘 어우러진다.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아일랜드가수 '엔야'의 뉴에이지 음악을 섞어놓은 것 같은 비장한 분위기의 주제곡이, 단종과 세조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역사에 스며들어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또한, <공주의 남자>는 배우 김영철을 더 이상 애꾸눈의 ‘궁예'가 아닌, 권력을 위해서라면 서슴없이 형제의 목숨도 빼앗는 '수양대군'으로 기억하게 만든 작품이다. 그간 수양대군의 역할 - 최근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화 <관상>에서 배우 이정재가 연기한 수양대군이다 - 을 맡았던 여러 배우들의 연기중, 내 상상 속 수양대군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다.

<공주의 남자>에는 단종의 삶만큼이나 슬프고도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다

판타지 장르 이상으로 상상력이 필요한 게 사극이 아닐까 한다. 단 몇 줄의 기록을 씨앗 삼아, 과거에 실제 벌어졌을 법한 대사와 상황을 시대적 배경에 어울리도록 버무려 흥미롭게 극을 키워나가기 위해서는, 역사적 배경 지식과 상상력을 겸비한, 탄탄한 작가적 역량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드라마적으로 잘 구성한 역사적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역사 공부를 하고, 시대의 풍파 속에서 인간이 어떠한 마음과 행동으로 역경을 딛고 헤쳐나갔는지를,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자들을 어느 정도까지 잔인하게 다루었는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킨 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고 배운다. 물론, 상상이 많이 가미된 사극이 늘상 안고 있는 '역사왜곡'이라는 맹점을 간과하기 쉬우므로, 기본적인 역사 지식을 갖추고 드라마를 본다면 더 알차고 즐거운 감상이 될 것이다.



- 드라마 <공주의 남자>를 보신다면, 이곳만은 꼭 방문해 보세요~

단종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

<공주의 남자>를 보고 난 얼마 후, 온 가족이 함께 강원도 영월에 있는 '청령포'를 방문했다. 이제 막 쫑알쫑알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하는 첫째를 데리고 영월을 방문한 날, 처연해 보이는 청령포 위로 드리워진 흐린 하늘이 드라마 속 단종의 슬픈 모습과 포개어지며 내 마음을 아리게 했다.

열여섯의 나이에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된 채 유배된 단종은,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는 이곳 외딴섬에서 하루하루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마음으로 지냈을까?
그의 마지막 날들을 그려보며, 가족들과 천천히 둘러보았던 그날의 청령포가 잊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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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슬픈 새 궁전을 나와

외로운 그림자 푸른 산을 헤매네

밤이 오고 가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1년이 오고 가나 이 원한을 다하지 못하네

새 지저귐 끊긴 새벽 남은 달빛은 흰데

봄 계곡에 핀 꽃은 피 같이 붉더라

하늘은 귀가 멀었는가, 슬픈 기도는 듣지 못하고

어찌 수심 깊은 내 귀에만 들려오는가

   - 16세의 단종이 유배길에 지었다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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