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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Mar 25. 2024

우리 안의 소녀가 씩씩하게 팔을 뻗을 때

중년 여성들의 덕질을 대하는 마음

일주일에 한 번, 캘리그래피 모임에 나간다.

캘리그래피 선생님과 소규모의 회원들이 캘리그래피 실력을 연마하고, 때로는 이런저런 주제로 수다를 떨기도 하는 이 시간이 나는 참 좋다. 사실, 내 첫 소설 <<나는 아미입니다>>표지에 실을 글자들을 내가 직접 쓴 캘리그래피로 꾸미겠다는 야심 찬 의지로 참여하기 시작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미적 감각이 타고나게 부족한 내가, 애초에 단기간 동안 표지에 실을 만큼의 캘리그래피 실력을 쌓겠다고 목표를 정한 것이 무리수였다. 결국 책표지는, 내 글씨 대신,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수려한, 캘리그래피 선생님의 글씨와 그림이 장식했다. 그렇다고 내가 모임에 나가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미약하나마 발전하고 있는 내 실력이 눈에 보이고, 무엇보다 같은 취미 생활을 하는 회원들 간에 오가는 대화가 일상에 큰 활력소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여러 명이 모이는 자리를 경험해 본 이들은 잘 알겠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대화는 곧잘 타인에 대한 험담으로 흘러가곤 한다. 주부들의 경우엔 신랑이나 시댁, 직장인들의 경우엔 상사나 동료들의 뒷담화가 종종 등장하기 마련이다. 물론, 같은 마음으로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다 보면 왠지 모를 동질감이 느껴지며 속이 후련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수다를 끝내고 뒤돌아 가는 길에는, 어쩐지 느껴지는 '찝찝함'과 알 수 없는 허무감이 밀려든다. 내 마음을 좋지 않은 곳에 낭비하고 너덜너덜한 빈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돌아서는 발걸음마저 터덜터덜, 가볍지가 못하다. 후련했던 느낌은 그저 찰나에 머무를 뿐이다.



그런데 캘리그래피 모임 회원들 간의 대화에는 삶에 에너지가 되는 대화가 펼쳐진다. 캘리그래피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캘리그래피를 하겠다고 오는 회원들에게는, 말로 콕 집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추측해 보건대, 무엇인가를 해내겠다는 의지, 아름다운 것을 일궈가며 일상을 살아가겠다는 마음 같은 것들이 아닐까 싶다. 이건 내게도 적용되는 내용이다. 미술에 젬병이지만, 나는 언젠가 캘리그래피를 능숙하게 잘 해내고 싶다. 그렇게 아름다운 글씨들을 스스로 만들어 내 일상의 곳곳을 장식하고 싶다. 지금도 우리 집 침실, 책장, 거실 벽면을 그림과 달력의 형태로 변신한 캘리그래피들이 인테리어 소품으로 적절히 활용되고 있다.



이번 모임에서는 가수 덕질에 관한 내용이 대화의 주된 주제가 되었다. 60대 회원 한 분이, 친구의 고모님인, 가수 '김호중'의 광팬인 팔순 어르신의 놀랍고도 재미있는 행보를 전하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그 후 40대 회원이, 가수 임영웅 덕후이신, 동네 반찬가게 사장님 얘기를 이었고, 그러자 나머지 회원들도 각자가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일화들을 들려주었다. 대화의 끝은, 중년여성(어르신들 포함)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팬심을 표현하고, 두터운 팬층을 형성하는 게 '좋은 시그널'이자 바람직한 사회 분위기를 형성한다는 결론으로 마무리 되었다. 내게는 몹시도 가슴 뭉클한 대화였다. 내 소설의 주제와도 관련이 있는 내용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중년여성들이 마음 터놓고 자기가 애정하는 가수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연대를 이루어 가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교직에 있었을 당시 나 자신도, 제자들이 좋아하는 방탄소년단의 팬이라고 선뜻 내세우지 못해, '혹시 지뉴쌤 아미세요?'라는 동료 교사의 물음에 쭈뼛거렸던 기억이 있다. 내 마음을 떳떳하게 표현하지 못하자, 그 이후 내 행동이나 말에도 제약이 생겼다. 돌이켜 보면, 내가 스스로의 마음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그것이 결국은 내게 일종의 족쇄처럼 작용했던 것 같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고 나서야 자유로운 덕후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느꼈을 때 나는 자그마한, 아니 어쩌면 제법 큰, 성장의 한 단계를 올라선 것 같았다. 용기 있는 표현이 그러한 변화의 발판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솔직히 5,60대 여성들이 임영웅에 그토록 마음을 내어주는 게 온전히 이해가 되는 건 아니다. 그건 개인적으로 내가 그가 가진 매력을 알려고 노력한 적이, 그의 팬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본 영화 <소풍>에 삽입된 그의 노래 ‘모래 알갱이’는 정말 훌륭했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같은 대상을 향해 함께 열광하고, 임영웅이라는 구심점으로 한데 이어져, 서로를 돕고 자발적으로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만큼은 온 마음을 다해 지지해주고 싶다. 어떤 대상을 향해 자신의 온 애정과 열의를 쏟아붓는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도 흔치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한다. 하나의 대상에게 바치는 열정이 결국 그녀들의 삶에 크나큰 에너지와 위로로 되돌아오리라는 것을, 아름다운 열기로 살아 움직이는 가슴을 가진 그들이 되리라는 것을..



이러한 현상이 점점 더 자연스러워지고, 심심치 않게 공론화되는 것은 SNS에서의 발달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누군가가 용기 있게, '나는 임영웅의 팬이다!'라고, 처음으로 외친 목소리가 있었기에 이 거대한 흐름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왜 그런 순간 있지 않나, 이 의견에 찬성(혹은 반대)하는 사람 손 들어 보세요,라고 진행자가 물을 때,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쩐지 자꾸 주저하게 되는 가운데, 누군가가 씩씩하게 손을 번쩍 들면 뒤따라 우후죽순처럼 뻗어 올라오는 팔들을 본 적이.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기꺼이 벽을 박차고 뻗어 나오는 용기 있는 팔들을, 찬란한 소우주를 이루는 별빛 같은 모습들을 보고 싶다.

내 소설에서 '나는 아미입니다!'라고 외쳤던 그 목소리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에 살고 있을 소년 소녀들이, 안으로만 자꾸 숨으려 들지 않고, 떳떳하게 고개를 내밀고 나와, 이 세상을 좀 더 밝고 활기 넘치는 곳으로 만들어 나가기를.

'이 나이에 뭘...'이라는 말보다는, '늦은 나이가 어디 있어? 앞으로 살 날 중에 지금의 내가 가장 젊은것을!'이라고 부르짖으며, 당당히 앞으로 나아갈 우리들이기를, 그러한 모습이 낯설고 신기한 것이 아닌, 일상적인 풍경이 되기를, 나는 소망한다.

썩 마음에 든다. ^^

내일부터 3일간 소설 <더듬이>의 나머지 세 편을 올리도록 할게요.

활기찬 한 주의 시작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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