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목소리는 그곳에서 울려 나온 것이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나는, 세면대 거울 너머로 보이는, 그림자 같은 형상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그저 암흑 속에 잠긴 듯 보였던 그것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점점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문득 어린 시절 친구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귀신은 모서리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한대."
오래 전의 어느 여름밤, 괴담 이야기를 나누던 무리 사이에서 친구 나정이 한 말이었다.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나는 욕실 구석에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차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껏 내가 봐 온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고, 나는 두려움보다 아름다움에 더 압도당하는 유형의 인간이다. 게다가 그녀의 모습엔 단순히 아름답다고만 표현하기엔, 겨울왕국에서 건너온 여왕 같은, 오묘한 분위기가 깃들어 있었다. 우아한 자태로 뻗어 있는 그녀의 오른팔 위에는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미세한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는 듯한 꼿꼿한 자세가, 그녀 못지않게 위풍당당해 보였다.
- 그 입 좀 다물지 그래. 침이 줄줄 흐르잖아. 혹시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야?
그녀의 말에 정신이 번뜩 든 나는, 거울 속 그녀에게 머물러 있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정말 내 입가에 침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줄줄, 까지는 아니었지만, 꽤나 흉한 모습이었다. 나는 손으로 슬며시 침을 닦아낸 뒤 다시 거울 속 그녀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그녀가 말했다. 아마도 내가 변기를 부여잡고 구토하는 모습을 다 지켜본 모양이었다.
- 당, 당신 누구야?!
- 나? 내 이름은.. '만자'야.
만자가, 까마귀가 올라앉아 있지 않은 왼 팔로, 허리까지 굽이치는 흑발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구수한 이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 왜 웃는 거야?!
만자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 이름이....
매서운 눈매의 만자 앞에서 차마 그 이상은 말할 수가 없었다.
- 내 정체성에 이만큼 잘 어울리는 이름을 난 들어보지 못했어. '만자'라는 말 몰라? 저기 바다 건너 파스타 좋아하는 인간들이 자주 쓰던데?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이탈리아로 배낭여행을 다녀온 친구에게서 들었던 말인 듯했다. '먹어.’라는 뜻이라고 했던가. 친구는 그곳에서 이 표현을 매일같이 접했다고 했다.
여신과도 같은 모습을 한 만자는 귀신이었다. 속담에 나오는, 친구와 둘이서 떡을 나눠 먹다 죽은, 때깔 좋은 귀신.
- 마지막 떡을 친구에게 양보했더라면 더 오래 산 사람으로 남았을 텐데. 물론, 때깔 좋은 귀신으로 떠도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만자는 때깔이 좋다 못해 빛이 나는 혼령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인, 그것도 같은 여자인 내가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 그런데,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생각보다 만자에게 적응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해야 할 일이 있어서.
- 무슨 말이야?
- 나는 잘 먹는 사람들이 명을 다하면 다음 세상으로 데려다줘야 해. 그런데,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도 내 몫이야. 혹여나 때깔 좋은 귀신들 틈에 섞이지 않게 격리 조치해야 하거든. 그런 인간들 중 하나인 네 담당이 바로 나야.
- 설, 설마 너, 저승사자야?
- 뭐.. 비슷해. 조금 특별한 케이스긴 하지만.
이렇게 말한 만자는 뭐가 그리 흡족한지 한동안 웃음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묘하게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저승사자라는 말에 공포를 느끼는 와중에도, 만자와 같은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다면 조금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외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내게 오래 산다는 것은 결코 복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이 아니던가. 나는 이제껏 내 외모를 지탱해 주었던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 난 그저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고 싶을 뿐이야. 먹는 것으로 장난치려는 게 아니라고..
어쩐지 내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만자는 한동안 집요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 지금 네 눈에 보이는 나의 모습을 말해 봐.
만자의 급작스러운 요청에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마치 눈의 여왕의 마법에 걸린 아이처럼, 내 눈에 보이는 만자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다. 책이라고는 읽지 않는 내가, 유려한 묘사에 능한 작가라도 된 듯, 그녀를 찬양하며 문장과 문장을 읊어댔고, 가만히 듣고 있던 만자는 얼마지 않아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 네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 그런 모습이구나.
- 왜, 넌 네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아?
- 네가 묘사한 것과 내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은 달라. 너도 그렇지 않을까?
만자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왠지 납득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더 아름다워지겠다며 먹은 것을 실컷 게워내었지만, 거울 속에는 퀭한 눈, 푸석푸석해 보이는 피부, 침으로 번질거리는 입가가 힘없이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자 한숨이 절로 나왔고, 내 한숨 소리와 동시에 까마귀가 귀청이 나갈 정도로 울어댔다.
- 놀래라! 도대체 그 녀석은 왜 달고 다니는 거야?
- 아, 나를 도와주는 녀석인데, 더 이상 기다리기 싫다고 하는데?
만자가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자 까마귀가 입맛을 다시는 것 같았다.
- 뭐야? 뭘 기다리기 싫다는 거야, 혹시, 나를 파 먹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나는 어느샌가 두 팔로 내 몸을 꽉 감싸 안고 있었다.
- 생각보다 눈치가 빠르네. 맞아.
만자가 심드렁하게 답했다. 그녀의 외모에 홀려 정신 못 차린 내가 문제였다. 만자는 생각보다 무자비한 혼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소리를 내지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을 박차고 나와, 내 방 침대를 파고들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봤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이에나가 헤집고 지나간 동물 사체의 마지막 한 점까지 남김없이 뜯어먹던 까마귀의 모습이. 아무리 죽음 뒤라고 해도 결코 까마귀 따위에 내 몸이 너덜너덜해지는 건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나는, 까마귀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도록 이불을 꼭 거머쥔 채, 이불과 한 몸이 되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만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 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