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욕실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욕실에 오랜 시간 머무를 수가 없었다. 모퉁이의 검은 형상은, 내가 욕실에서 일정 시간 이상 머무르면 만자의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무슨 이유에서인지, 만자는 욕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만자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내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그녀와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까마귀만큼은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을 지체해 두 번째 만자의 모습을 마주했던 날, 그녀는 까마귀에 관한 비밀 하나를 내게 말해주었다.
- 죽음의 순간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게 왜 청력인 지 알아?
- 알고 싶지 않아. 바쁘니까 말 시키지 마.
욕실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기 위해 애쓰며 내가 말했다.
- 까마귀 녀석이 가장 마지막에 부리를 대는 곳이 바로 사람의 귀거든.
볼일을 본 뒤 잽싸게 뒤처리를 하는 와중에도, 나는 까마귀 녀석의 거대하고 날카로운 부리가 인정사정없이 내 귀를 파 먹는 장면이 연상되었고, 휴지를 쥐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제대로 뒤를 닦아내지 못하고 허둥댔다. 그런 나를 만자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아니, 아니. 무서워할 건 없어. 네가 생각하듯 이 녀석은 그리 무자비하지 않아. 그저 가만히 부리를 대기만 할 뿐이야. 그럼 모든 것이 평화롭게 변하는 거야. 인간의 육신에서 다음 세상을 위한 영령으로. 물론 너는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인간이니까, 네가 원하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긴 힘들겠지만 말이야.
만자가 짓궂은 표정으로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는 순간, 나는 손도 씻지 않고 욕실을 뛰쳐나왔다. 나를 노려보는 까마귀의 눈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볼일을 보는 데에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여유롭게 샤워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만자를 맞닥뜨린 이후에 집안 곳곳을 점령하고 있던 냉기를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바깥은 아직 여름이었지만, 냉장고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은 감각에, 나는 밤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상상하며 뒤척이기 일쑤였다. 에어컨 한 번 틀지 않고도 냉방병에 걸릴 것 같았다.
나정의 찜질방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나정은 찜질방 사장의 딸이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대중탕을 운영하던 나정의 부모님은 제법 사업 수완이 좋았던지, 점점 가세를 불리다가 급기야 꽤 규모 있는 찜질방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부모님을 둔 나정은 늘 여유로워 보였다. 나정의 일상은 생계를 위해 인내하고 버텨야 하는 날들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우나를 자주 해서인지, 특별히 돈을 들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 어린아이 같은 피부를 지녀, 화장을 하지 않아도 늘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나정이 가진 것들이 탐났다. 때론 견디기 힘들 정도로. 내가 아등바등 애써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나정에게는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외모에 관한 칭찬을 곧잘 듣는 나였지만, 나정과 함께 있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자신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나는 나정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면서도, 찜질방에 무료로 입장시켜 줄 테니 들르라는 나정의 말에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실로 오래간만에 나정의 찜질방에 갔을 때, 나정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나는 밝은 목소리를 가장하려 애쓰며, 나정과 다소 어색하고도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숯가마방으로 직행했다. 그곳은 찜질방에서 유일하게 모서리가 없는, 원형으로 되어있는 구조였다.
- 그래, 바로 이거지~~
나는 흠뻑 땀을 흘린 뒤 향할 목욕탕을 떠올리며 잠깐의 행복에 젖어들었다. 그때였다.
- 그렇게 한 번 오라고 해도 안 오더니 웬일이래. 너,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나정이 식혜와 구운 계란을 들고 나타났다. 나정의 고운 피부도, 그 순간, 내가 좋아하는 식혜와 구운 계란 앞에서 빛이 바랬다. 내 시선은 곧바로 나정의 손으로 향했고,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올랐으며, 목소리는 옥타브를 넘나들었다. 화장실에서 맘 놓고 구토를 하기 힘든 지금의 상황이 우려스러웠으나, 그동안 더러움과 냉기를 잘 버텨낸 내게 이 정도의 선물은 허락해도 좋은 것이리라.
- 혹시, 그것들, 나 주려고?!
- 너 좋아하는 티 너무 난다?
나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 오래간만에 왔는데, 오랜 친구로서 이 정도야 기본이지 뭐.
역시나 나정의 말에서는 가진 자의 너그러움이 묻어 나왔다.
우리 사이에 우정이 존재했던 적이 있었는지 의아스러웠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나온 것은 분명하니, 어쨌든 나정의 말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몸에 평화가 깃드니 마음도 여유로워진 나는, 노릇노릇 잘 굽힌 계란을 건네는 나정의 손을 덥석 잡았다.
- 고마워! 잘 먹을게.
나정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너 진짜 아무 일 없는 거야?
어쩐지 나정이 내게 '무슨 일'이라도 있길 바라는 것 같아 짜증이 나려다가, 금세 관대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 별일 아니야. 그냥 좀 추워서 그래.
- 이 더위에 춥다니,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 야, 제발 귀신 얘기 좀 하지 마. 춥다 추워~
나정이 손바닥을 펴서 내 이마에 갖다 대더니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저었다. 그럴 법도 했다. 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이라면 내가 하는 말이 어느 정신 나간 인간의 뜻 모를 말처럼 들릴 것이다. 나는 나정이 병자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나를 대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 나정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귀신은 모서리에 산다는 거...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였다.
- 아.. 그거. 괴담집에서 읽었어.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내 실수였다. 공포, 스릴러 물을 좋아하는 나정의 눈에 생기가 번뜩였다. 나에게 쏠렸던 관심을 돌리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끝날 줄 모르는 나정의 이야기에 나는 그만 불을 지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정은 모서리귀신, 어둠, 습기와 냉기, 잠 못 드는 밤, 꺾이는 관절 소리, 가위눌림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쉬지도 않고 이어갔다. 나는 개중 '습기와 냉기'에 귀가 솔깃했다. 나정의 말에 따르면 귀신은 습기와 냉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만자가 욕실에 머무르고 있는 것도 그래서일까. 그렇다면, 욕실의 습기를 제거한다면 더 이상 까마귀 녀석을 맞닥뜨릴 일도, 섬뜩한 부리 끝에 내 몸을 맡길 일도 없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건, 다시 말해, 잠깐의 샤워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니. 잠시 기뻤던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고, 나는 나정의 말을 백색소음 삼아 고민에 빠져들었다가,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식혜의 뒷맛이 유난히 쓰다는 생각을 하며.
- 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