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자의 방문 - 4

by 지뉴

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계란 부스러기, 빈 식혜통과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내 기억으론 분명 식혜가 남아 있었는데, 나정이 비워버린 것일까,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꼬깃꼬깃 접힌 메모지를 펼쳤다.


'네가 왜 여길 왔는지 알 것 같아. 하지만 여기 너무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바빠서 먼저 갈게. 우리 또 봐.^^ - 나정'


'나정의 글씨체가 이랬던가?' 글씨체는 둘째 치고, 어딘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지는 메모였다. 시계를 보니 깜빡 잠이 든 후 한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나는 식혜통이 놓인 쟁반을 든 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흔들리는 쟁반 때문에 식혜통이 불안정하게 덜그럭거렸다. 수분을 너무 많이 뺀 후유증인 듯했다. 찜질방에서 단잠에 빠져보기는 처음이었다.
'기집애, 기왕 선심 쓰는 것 뒤처리도 해 줄 것이지...'
좀 전까지 나정에게 고마웠던 마음은 어디 가고, 원망의 감정이 바람 앞의 갈대처럼 나부꼈다.

'그래도 작별인사는 하고 가야겠지.'

나는 어떤 말을 건넬까 생각하며 나정의 모습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정이 보이지 않았다.

- 혹시, 나정 씨 어디 갔나요?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다.

- 누구요?

내 목소리에 힘이 없었던지, 직원은 내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고민할 필요도, 표정을 꾸며낼 것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다음에 혹여 나정이 뭐라고 하면, 변명하기도 좋은 상황이질 않나. 나는 나정이 돌아올 새라 황급히 목욕탕으로 향했다.



오래간만에 뜨거운 물에서 오래도록 반신욕을 해서인지, 귀가를 하자마자 집안의 냉기를 자각하기도 전에 노곤함이 엄습했다. 나는 새어 나오는 하얀 입김을 바라보며 무거워진 몸을 침대에 뉘었다. 마치 거대한 드라이아이스 한 덩이라도 된 듯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옷장 속에 고이 모셔둔 구스다운 이불을 가져와 얼굴 아래까지 덮었다.

얼마동안 그렇게 누워 있었을까, 사위가 어두워질 때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자 아랫배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더 앉아 있다가는 옷에 실수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들었고, 나는 어떤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곧바로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변기 위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내게 이토록 안도감을 준 적이 있었던가. 그동안 변기는 내가 고통스럽게 붙잡고 있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의지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기댈 수밖에 없는. 견디기 힘겨웠던 통증이 조금씩 옅어지자 흡족한 미소와 함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심지어 눈가에 환희의 눈물마저 한 방울 찔끔 솟았다.


- 아주 눈물겨울 지경이야!


만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 뒤로 손뼉 칠 때와 유사한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상황에 미처 시간 확인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욕실 모퉁이에 시선을 고정하니 만자와 까마귀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왠지 그 눈빛에 굴복하면 안 될 것 같아 나는 최대한 시선을 내리깔지 않기 위해 애썼다.


- 그 자세 좋아. 지켜보는 재미가 있어. 하하~

만자의 웃음소리와 함께 까마귀가 울음을 울었다. 예의 그 끔찍한 상상이 되살아났다.

- 나 더 살고 싶어. 앞으로 허튼짓 안 할게. 그러니까, 제발~~


나는 부끄러움은 잊은 채 두 손을 모아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욕실 거울에 비칠 내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속옷을 반쯤 내리고 엉거주춤 앉아 있는 자세에, 눈물 어린 얼굴로 간절히 빌고 있는, 볼품없는 이십 대의 한 여성이. 그러자 정말로 울고 싶은 마음이 되었다. 얼어붙을 듯 얼얼한 엉덩이 아래에서는 역겨운 냄새마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힘 빠진 다리로 일어서지도, 앉은 자세에서 물을 내리지도 못한 내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 너 덕분에 재미있는 장면 감상했으니, 일단 살려는 줄게. 이 녀석도 좀 더 기다려보겠다고 하니. 하지만 알지, 자꾸 이상한 장난치면...?

만자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번뜩였고, 나는 목이 꺾여라 고개를 끄덕였다.

- 계란 설사라 그런지 냄새가 아주 지독하군.

만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 어떻게 알았어, 내가 계란 먹은 거?

- 네 눈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곳에 내가 없는 건 아니야.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엔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많거든. 네가 일상적으로 보고 있는 어떤 대상이 실은 나일 수도 있고.

만자의 기묘한 눈빛에 내 팔뚝에서 소름이 돋아나왔다. 그러고 보니 찜질방에서, 나정의 메모에서, 나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던 것 같다.


- 인간이 기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에도, 삶에 유용한 지혜를 얻는 것에도 우리 지분이 있다고. 단지 너희가 모르고 있을 뿐이지. 삶과 죽음은 늘 공존하고 있는 거야. 영감(靈感 )을 얻는다,라는 말을 잘 생각해 봐.

나는 그때 귀를 틀어막았어야 했다. 그랬었더라면, 일상에서 속담을 접할 때마다 이토록 머릿속이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 대부분의 인간은 스스로 지혜로울 만큼 지혜롭지 못해. 너를 봐. 나와 이 녀석을 만나고 나서야 가까스로 음식으로 장난치며, 생명을 우롱하는 짓을 그만두게 되었잖아? 어리석은 행동이 궁극엔 너를 어디로 끌고 갈지 생각지도 못하고... 인간에게 구전되는 속담들 중 많은 것들이 실은 우리 영령들이 만든 거야.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같은 나의 작품도. 하하~


만자는 몹시 흡족해하는 표정으로 긴 머리를 우아하게 쓰다듬었다. 만자의 기다란 머리칼 몇 가닥이 슬로 모션으로 욕실 바닥 위로 낙하하며, 마치 선명한 흑색의 곡선 무늬처럼 하얀 타일을 장식했다.


- 나는 네가 나처럼 때깔 좋은 귀신이 되길 바라. 그러니까…

- 그래, 그래. 무조건 맹세할게!

만자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 위 만자의 긴 머리칼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자와 까마귀는 그런 나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듯했지만, 어쩐지 그들의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가 다시 시선을 위로 향했을 때 그들은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다. 욕실의 냉기가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가 겪은 만자의 방문기는 여기까지다.
그 이후로 나는 만자를 만나지 못했다. 47킬로그램을 부르짖던 남친과는 과감하게 결별을 고하고,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나를 따라다니던 불안감과 초조함이 옅어진 일상이 내게 주는, 생각지도 못했던 만족감을 느끼며.

그렇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녀의 말처럼, 이 세상에는, 생이 깃든 한시적 몸뚱이와 영원을 살아가는 영(靈)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내 의지가 약해지려는 어느 순간이면, 집안 곳곳에 굴러다니는 저 기다란 머리카락들처럼 소리 없이 머무르고 있던 만자가, 다시금 내 앞에 모습을 나타내리라는 것을.



지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귀신이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증명할 만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만자의 방문 이후로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붙잡고 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반쯤 정신 나간 여자 취급을 받을 것이 뻔하질 않나.

그러니 지금 당신에게 이렇듯 묻고 있는 것이다.

가명 뒤에 숨어서, 비밀스럽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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