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옅어지고 하늘은 점점 높아져갔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젖은 낙엽 냄새가 바람에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궁금해졌다. 하와이에도 가을이 찾아오는 건지.
때때로 엄마 생각이 났다. 죽어서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먼 이국땅에 묻혀 있을 엄마 인생이 문득 가여워졌다. 그러나 이내 서운함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불쑥 올라왔다. 엄마는 삶을 마감하기 전 내가 한 번도 보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교내 봉사활동이 끝나갈 무렵 근수 일행이 내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녀석들은 주로 내가 청소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청소가 끝날 때쯤 내 쪽으로 몰려와 바닥에 쓰레기를 버리고는 떠들썩하게 사라지곤 했다. ‘보기 좋다’, ‘네가 이렇게 청소에 소질 있는 줄 몰랐다’ 등의 말을 내뱉으며.
처음 몇 번은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러다 나중에는 그저 무심히 녀석들이 버린 쓰레기를 줍고 또 주웠다. 그렇게 몇 번 반응하자 어느 순간부터 근수 얼굴에 답답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마치 내가 화라도 내기를 바란 사람처럼.
어느 날, 방과 후 홀로 나타난 근수가 청소하는 내 모습을 힐끔거렸다.
“재밌냐?”
근수가 물었다.
“….”
“재밌냐고?”
“뭐가?”
“지금 하고 있는 그거.”
근수가 검지 끝으로 내가 쥐고 있는 청소도구를 가리켰다.
“생각보다는….”
조소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던 근수가, 이내 오른손을 쭉 뻗어 수줍은 듯 악수를 청하는 몸짓을 취했다. 근수 손을 쳐다보는 둥 마는 둥, 나는 걸레질을 하고 있던 바닥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난번에는 덕분에 맥주 잘 마셨다. 네가 사준 거라 그런지 맛이 죽이더라. 캬~~”
근수가 엄지 척을 해 보였다.
“좆 까, 새꺄.”
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신기하게도 평소에 잘 나오지 않는 욕설이 근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나온다. 만약 할머니가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니가 진짜 신우 맞나?’라고 묻거나, 기겁하며 야단을 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역시! 이제 좀 너 같네. 요즘 너, 애들한테 너무 친절해 보여서 이상했거든. 것도 많~이.”
나는, 아주 잠시, 근수를 노려봤다.
“왜, 또 치게?”
근수가 활짝 편 두 손을 앞으로 내밀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청소해야 하니까 좀 비켜 줄래? 그리고 이제 그만 얼씬거려. 별로 반갑지 않으니까.”
나는 이나 선생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려 애썼다.
“왜 이렇게 까칠하게 굴어? 난 그냥 너랑 화해하려고 온 건데. 나한테도 다른 애들한테 하는 것처럼 좀 친절하게 대해주면 안 되겠냐? 그래도 우리 한때는 꽤 친한 사이였잖아?”
사실, 근수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중학교시절 내가 방황하고 있었을 때, 손 내밀어 준 아이가 근수였다.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근수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아 보였고, 그래서 더 내 마음을 잘 이해해 줄 것 같았다.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줬던 친구가 근수였고, 무엇이든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결국 그게 문제였다. ‘무엇이든’ 함께 하려고 했던 것이.
내가 가고 싶지 않은 길로 근수는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외로워지더라도 근수 손을 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긴 것뿐이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데, 나는 그때 내가 한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그때의 선택이 더 나은 결과를 만들지 못하더라도, 다음번에 올바른 선택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포기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계속 끌려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한때는 인생에서 우정만큼 소중한 것도 없을 거라 믿었다. 우정은 단단한 바위산처럼 오래도록 변치 않는 것이라고. 그렇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우정은 할머니의 두부처럼 쉬이 바스라질 수 있는 존재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내가 끝까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사람들이 말하는 꿈? 사랑? 그것도 아니면 신? 누군가 내게 답을 알려주면 좋겠다. 답이 있는 거라면 말이다.
“네가 친구 하자고만 안 하면, 그래, 너한테 좀 더 친절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걸레가 훑고 지나가는 바닥을 확인하는 척하며 내가 말했다.
“난,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난 말이야…”
근수가 뜸을 들였다.
“솔직히, 너한테, 반했거든. 아 씨발, 나 게이인가?”
별안간 근수가 발작적으로 웃어댔다.
“미친 새끼.”
근수를 보며 혼잣말인 듯 뱉어놓고 왠지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그 주먹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감추고 살았냐? 지금 와서 말이지만, 너 마치 게임 끝판 대장 같았다. 조용히 숨어 있다가 ‘짠’하고 나타나서는 그냥 막 다 때려눕히는 그런 끝판 대장 말이야.”
근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마구 휘둘렀다.
“너는 처맞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새꺄?”
“그래, 내가 좀 처맞긴 했지. 쪽팔리지만, 사실, 존나 쪽팔리지만… 난 너랑 다시 친구 먹고 싶다. 옛정이 있잖아, 우리?”
근수가 히죽거리며 제 오른쪽 주먹을 걸레를 쥐고 있던 내 왼 주먹에 갖다 댔다. 나는 움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난 후, 근수의 왼쪽 뒤편 바닥에 얼룩져있는 껌자국 위로 걸레를 세차게 들이밀었다. 내 뒤통수에 달라붙어있는 근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진호나 그만 괴롭혀라.”
눈길을 주지 않으려다가 흘깃, 근수를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근수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 좋은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는 하지 마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권리가 있는 거니까… 그리고, 다시는 그런 눈으로 나 쳐다보지 마라. 뭐랄까, 꼭 길거리 노숙자가 된 기분이니까.”
화가 난 듯 어딘지 모르게 슬픈 것 같기도 한 근수의 목소리가, 나를 막아서고 있던 단단한 무엇인가를 조금 밀어내는 듯했지만,
“참고할게.”
나는 무심한 척 대답했다.
근수가 복도를 휘 둘러보더니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와서는 팔을 가볍게 한 번 툭 쳤다.
“수고해라… 또 보자.”
‘또 보자.’ 근래 들어 몇 번째 들어보는 근수의 인사말이었다. 그 순간 근수의 인사가, 이나 선생님이 ‘긍정 확언’처럼 반복하는 말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찰나의 생각에 잠긴 동안, 머뭇거리며 서 있던 근수가 등을 돌려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한동안 걸레질을 멈추고 선 채, 사라져 가는 근수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수의 등이 쓸쓸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