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내 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학폭위 심의결과 교내 봉사활동을 하는 선에서 처분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교내 구석구석을 돌며 청소를 하거나, 분리수거실을 깔끔히 정리하는 게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이면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쓰러져 쪽잠을 자기 일쑤였다. 그러나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인 것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러한 날들도 점점 별다를 것 없는 나의 일상이 되어갔다.
어떤 날에는 잠 한숨 자지 않고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것으로 주먹을 쓴 죗값을 치르는 거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금토 야간으로 아르바이트 시간을 변경했다. 학교에서 금요일 하루만 잘 버티면 짧은 시간 안에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야간 아르바이트생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던 사장은 매우 반가워하며 일정 기간 이상 일을 해주면 시급을 더 올려주겠다고 했다.
첫 월급을 타고 할머니에게 생애 처음으로 용돈 십만 원을 내밀었다. 사실 현금보다 선물을 주고 싶었지만, 무엇을 사야 좋을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송이가 추천한 ‘새빨간 내복’은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이럴 땐 송이의 취향이 할머니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계절 탓도 있었을 테다. 첫 월급을 탄 그날이 겨울이었다면 빨간 내복에 마음이 기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빨강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색이기도 하니까.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온 할머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 보이는 나 자신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무얼 사 주겠다고 하면 할머니는 ‘괜찮다. 필요한 것 없다’라며 오히려 내가 필요한 걸 사라고 말했을 게 뻔하지만. 할머니는 용돈도 한사코 받지 않으려 했다. 내가 힘들게 일해 번 돈을 받을 수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의지가 할머니 고집을 꺾었다. 손자에게서 첫 용돈을 받아 든 할머니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손자에게서 받는 용돈은 결단코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는데 말이다.
송이가 종종 편의점에 들렀다. 송이는 학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기 전,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를 사 갔고, 이따금은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무얼 하는지 제법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 그럴 때면 송이는 내 쪽을 흘끔흘끔 쳐다봤는데, 그 시선이 불편하면서도 싫지만은 않았다. 어떤 때는 오히려 내가 그런 불편함을 즐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때때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를 감정들이 나를 붙들었다 지나가곤 한다.
“너희 집 근처에는 편의점 없어?”
어느 날 내가 송이에게 물었다.
“아니, 있어. 그런데 내가 원하는 바나나우유는 안 팔더라고.”
송이가 우유의 상표 부분을 손으로 짚어 보였다.
“초딩 입맛이구나? 나도 우유는 잘 마시지만, 그건 너무 달아서 못 먹겠던데.”
내가 말했다.
“그래? 스트레스도 풀리고 동시에 건강해지는 느낌 들어서 난 좋던데? 우유지만 달콤하잖아. 흰우유는 너무 밋밋해.”
‘밋밋해’라는 말을 하며 송이가 마치 심통이 난 미야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학교 갈 때 하나씩 가져다줄까? 날도 더운데 굳이 여기까지 올 거 없잖아…?”
송이가 아무 말 없이 잠시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었는데 들를 곳이 생겨 나쁘지 않은 걸. 너 일 열심히 하나, 안 하나 감시하는 것도 시간 때우기 용으로 딱이고. 그나저나, 생각보다 너 그 파란색 조끼 은근 잘 어울린다?”
‘그럴 필요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길 원했던 것인지 괜스레 웃음이 나려 했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난 감시받는 거 싫다. 그 누구한테라도.”
였다.
“참고는 할게.”
송이는 계산을 마친 우유를 매장 한편에 선 채로 홀짝이며, 내가 일하는 모습을 곁눈으로 살피는 듯했다. 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손님이 몰려들었다. 나는 송이를 신경 쓸 새도 없이 일을 해야만 했고, 손님이 빠져나간 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송이는 골목길 어귀에 머물러있던 햇볕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사람들의 소음이 밀려나간 가게에 홀로 서 있자니 불현듯, 가슴 한 구석이 헛헛해졌다.
많이 피곤하지 않은 일요일이면 홀로 도서관에 갔다. 글을 끄적이기 시작하면서 타인이 쓴 글을 읽어보고 싶은 욕구가 커졌기 때문이다.이나 선생님이 국어시간 추천해 줬던 책부터 읽어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집어 든 책은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 향기가 나쁘지 않은 책이었다. 언젠가 송이가, 동명의 영화 속 주인공 남자애들이 지성미 넘치게 잘생겼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이 나, 어떤 이야기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책을 들고 다니며 틈틈이 이어서 봤다. 이런 나를 보고 진호는 ‘어울린다’고 했고, 송이는 ‘좀 이상해 보인다’고 말했다. 책 속 주인공들은 나와 많이 다른 상황에 놓여 있는 듯했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들을 응원하며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그들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마음을 담그고 있는 시간 동안만큼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고, 그런 느낌이 나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송이는 글쓰기 과제에 대해 이나선생님에게서 칭찬받은 나를 미심쩍어했다. 얼마 전 이나 선생님은 최소한의 분량만 정해진 자유형식, 자유주제의 글쓰기 과제를 내줬다. 그런 글쓰기 과제가 주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제껏 내가 학교에서 경험했던 글쓰기는 독서 감상문 내지는 주제가 정해진 것들이었다. 그다지 흥미나 호기심이 일지 않았던.
이번 과제를 하면서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글쓰기에 흥미를 갖지 못한 이유는 나를 가두는 글쓰기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나 선생님의 과제를 하며 처음으로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자유로이 뛰어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과제를 수행했다기보다는, 나 자신을 다독이고 치유하는 과정을 겪은 것 같았다고나 할까. 카타르시스라고 부를 수도 있을 법한.
“내 이상형이 글 잘 쓰는 사람인데, 이신우 네게 그렇게 훌륭한 재주가 숨어 있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
이나 선생님에게서 칭찬을 들었던 날, 송이가 의구심이 곁든 듯 신이 난 표정으로 힘주어 말했다.
“관심이 가는 여자를 꼬드기기 위해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고 한번 써봐. 글 좀 읽는 내가 봐줄 테니까. “죽은 시인의 사회”에도 나오잖아. 언어는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이 누나가 너에게 진정 소질이 있는 건지 판단해 주겠어.”
언어가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었지만, 왠지 송이의 말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학교는 여전히 버거웠고, 때론 덜 힘겨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 1학년 때보다는 학교생활이 견딜 만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내일에 대한 옅은 기대감이 움트는 것 같았다.
기다려지는 수업도 생겼다. 국어시간이었다. 물론, 항상 그런 건 아니었지만. 비유와 상징으로 똘똘 뭉친 작품들을 접할 때면, 작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라는 과제가 주어지면, 여전히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기억이 시작되는 그때부터 난 숨바꼭질이나 숨은 그림 찾기에는 소질이 없었다. 숨고 싶어서 숨어있는 대상을 애써 찾아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만 반복했을 뿐이다. 머릿속으로 힘든 노동을 하듯, 마치 복잡한 기계 부품을 하나하나 분해하듯 읽어내야 겨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것에 나는 서툴렀다. 나는 내 생각과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작문 시간이 좋았다.
이따금이라도 기대되는 수업이 있다는 사실이 내게 어떤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는 듯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어시간이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는데, 이제 가로등 불빛이 드문드문, 안갯속을 비추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