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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Sep 30. 2024

#14 다른 듯 같은 우리

  여름 방학과 함께 새로운 일들이 시작되었다. 아니,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나 자신에게 빈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로 가득 채워져, 나를 괴롭히는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 없는 하루하루가 절실했다. 나도 진호처럼 열심히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싶었다.


  그즈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도 별다른 성과가 없어 포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즈음, 운 좋게도 마지막으로 들렀던 편의점 사장님이 내 첫인상을 좋게 봤다며 계약서를 쓰자고 했다. 최소한 세 달 이상은 성실히 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당부와 함께.


  “요즘 젊은 친구들 중에는 시작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말도 없이 안 나오는 경우들이 꽤 있어. 그래가지고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쯧쯧.”


  사장이 내 인상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고, 나는 최대한 성실하고 진중해 보일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예전에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에 기를 쓰고 반대하던 할머니도, 고모와의 다툼 이후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지, 내 결심에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낮에는 몸을 바쁘게 굴리고, 해가 지면 글을 끄적이고, 음악을 듣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쳐 쓰러져 잠을 잤다. 그러자 악몽을 꾸는 날이, 학폭위 결과에 대한 걱정이 점차 줄어들었다. 근수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흐트러진 진열대를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 편의점 전면 유리창 밖에서 안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근수였다. 웬일인지 혼자였다. 치료가 잘 된 건지 다친 코는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듯했다. 내 얼굴을 확인한 근수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편의점 내에 다른 손님은 없었다. 잠시 내 쪽을 흘끔거리던 근수가 냉장고 쪽으로 향하더니 맥주 두 캔을 집어 들고 와 계산대 위에 쾅, 소리를 내며 올려놓았다. 나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근수가 내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넌 손님이 왔는데 뭐 하는 거냐?”

  “….”

  “야, 계산해야지!”

  “미성년자한테 술 안 팔아.”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나를 노려보던 근수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야! 지금 장난쳐? 너도 술 마시잖아? 친구 좋다는 게 뭐야. 이럴 때 덕 좀 보자. 그리고 넌 나한테 지은 죄도 있으니까 용서를 구해야지? 내가 특별히 인심 써서 이걸로 빚 갚은 셈 쳐줄게.”


  보란 듯이 근수가 코를 내쪽으로 들이밀었다.


  “너 그렇게 만든 건 미안하다. 그런데, 나한테 너 같은 친구는, 이제 없어.”


  근수의 표정이 돌변했다.


  “나 같은 친구가, 어떤 친군데?”

  “… 몰라서 물어?”


  “응. 난 모르겠는데? 아, 내가 확실히 아는 게 하나 있긴 하다. 너나 나나 같은 처지라는 거. 아니, 같은 부류라고 해야 하는 건가? 너 요즘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차피 다른 사람들 눈에는 우리 둘 다 그렇고 그런 놈들인 거야. 아저씨한테 죽도록 맞고 자란 나나, 아저씨 없이 자란 너나. 아닌가, 그런 인간 밑에서 자란 나보다는 차라리 아무도 없는 네가 나은 건가? 아무튼, 우리 같은 놈들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같이 한잔 하자. 이걸로!”


  근수가 맥주캔을 흔들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 근수 손 안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는 캔에 신경이 더 쓰였다.


  “그렇게 흔들어대지 마. 거품 차오르니까.”


  나는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오른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근수가 잠시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는가 싶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네가 아무리 모르는 척 해도 나는 다 알아. 너 지금 막 발버둥 치고 있잖아? 우리를 깔보는 시선에서 벗어나보려고. 내 말이 맞지?… 내가 한 가지 말해주겠는데 너, 금방 지칠 거야. 나처럼 그냥 생긴 대로 살아. 그게 편하잖아, 너도?”


  근수 손 안의 맥주캔을 따라 내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불현듯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부러 눈에 힘을 주며 목소리를 높였다.


  “… 나는 너처럼 안 살아. 너야말로 착각하지 마. 나는 너랑 달라. 그러니까 이제 좀 꺼져줄래? 그리고 자꾸 우리, 우리, 하지 마. 듣기 거슬리니까.”


  근수가, 내 속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예리한 눈빛으로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봤다. 근수의 시선을 피하고 싶은 걸 버텨내기가 힘들었다. 다행히도, 내가 고개를 돌리기 전에 근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누구 말이 맞나 한번 지켜보자. 이건 네 사과의 징표로 알고 가져간다. 다음 번엔 담배도 부탁할게. 그럼… 또 보자.”


  근수는 이제 막 상처가 아문 코를 손으로 가리키며 다시 한번 내 눈을 지그시 쏘아보더니, 이내 맥주 캔과 함께 편의점 밖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는 새, 한동안 잊고 지냈던 말을 토해버렸다.


  “개새끼!”


  나 스스로 흠칫 놀랄 정도의 크기로 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때마침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던 손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얼굴이 화끈거리며 저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근수가 사라진 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계산을 하고 매대 정리를 하면서도 근수의 말이, 근수가 무심히 흔들어대던 맥주 캔의 잔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와는 다르다,라고 근수 앞에서 떳떳하게 말했지만, 왠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근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쳤던 그날, 손 끝에서 전해지던 감각이, 격렬한 떨림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순간 호흡이 멎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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