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뽀얀 피부와, 한여름의 태양에 훤히 비치는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더불어 레몬빛에 가까운 금발, 그것도 아니면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간 머리카락의 소유자였다. 케이블도 OTT도 자동차도 거의 없었던 그 시절, 좁은 골목길 한편, 몇 평 될까 말까 한 조그만 주택의 손바닥만 한 티브이가, 내가 간접 체험할 수 있는 세계의 거의 유일한 통로였기에, 공중파 티브이 세상 속 멋진 주인공의 모습은, 내가 간절히 원하는 외모의 유일무이한 지향점이 되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아이는 자신이 원하고 가꾸면 언젠가는 백설공주처럼 곱고 새하얀 피부와 '은하철도 999'의 메텔같이 바람결에 가슴 설레도록 아름답게 흩날리는 긴 금발 머리를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그 시절 꼬맹이는, 멜라닌 색소가 부족해 발현되는 외양을 흠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소망했던 아이의 꿈은 결국 이뤄지지 못했고,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유빛깔의 매끈함에 차마 이르지 못한 살결과, 멜라닌 색소의 부족을 넘어 결핍의 상태에 이르러 하얗게 표백되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가진, 중년의 여인이 되는 슬픈(?) 결말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로 직행하지 않고 잠시나마 내가 원했던 빛깔을 경유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되지도 않을 상상도, 칠흑 같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은발이었으면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절로 나오는 한숨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조심스럽고도 은밀하게, 검은 바위 위로 영역을 넓혀가는 이끼같이 집요하게 비집고 나오는 흰 머리칼에 흑빛 헤어쿠션을 도포하며 외출 준비를 한다. 이런 내 모습을 기어코 발견한 짝꿍이 웃음소리를 감출 생각도 없이 큰소리로,
"지금 그거, 혹시 흑채 뿌리는 거야?"
라고 묻는다. 조용히 미션을 완수하려 했는데 굳이 저렇게 아는 척을 할까, 얄미운 마음에 매서운 눈빛을 날리며,
"흑채 아니고 쿠션이거든. 헤어, 쿠션! 흑채는 뿌리는 거지만, 이건 (점잖게) 바르는 거라고...."
라고, 그다지 설득력 없어 보이는 반격을 한다. 역시나 돌아오는 짝꿍의 대답은,
"그거나, 그거나... 크크~"
같이 나이 들어가는 마당에 저 인간은 웃음이 나오나 싶지만, 어쨌든 유전학적인 면에서 나보다 멜라닌 색소의 결핍 진행이 더딘 짝꿍이기에, 더 이상 말을 보탰다가는 아무래도 내가 불리하겠다 싶어 그만 입을 꾹 다문다. 세월 앞에 장사 없듯 선천적 DNA 앞에서도 강자는 없으니 말이다.
언제까지고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겠다고 마음먹었건만, 어찌 된 일인지 새치, 아니 흰머리만큼은 마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이십 대 후반에 고개 내밀기 시작한 새치들을 봤을 때, 나이 마흔이 되기도 전에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를 하고 있던, 나보다 겨우 열두 살 많은 막내 삼촌을 목격했을 때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어야 하는 건데, 후회도 해보지만, 그랬다고 한들 상황이 달라졌을까 싶기는 하다. 멜라닌이 부족한 신체를 흠모했던 나의 육체에, 세월을 안고 돌아온 멜라닌이 역습을 가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빠와 외할머니 생전의 마지막 모습이 거부하고 싶을 만큼 충격적인 장면으로 뇌리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흰머리의 아빠와 외할머니를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빠와 할머니에게 머리를 검게 염색하는 것은, 생에서 가장 정성껏 치러내야 할, 세월에 저항하며 생의 의지를 북돋우는 일종의 의식처럼 보였다. 머리뿌리가 하얗게 올라올 무렵이면 아빠와 할머니는 각자의 자리에서, 비슷한 과정을 거쳐 유사한 장면을 그려냈다. 잉크 냄새 폴폴 나는 신문지를 바닥 가득 펼치고, 바스락거리는 비닐 가운을 입은 채, 꾸덕한 먹물을 잔뜩 뒤집어쓴 듯 앉아있는 모습은 마치 장모와 사위가 아니라, 사이좋은 모자와도 같은 느낌은 주곤 했다.
그래서일 거다. 어느 시점 이후,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의 아빠와 외할머니가 충격적일 만큼 낯설게 보였던 것은. 그 모습은 내게 마치 아빠와 할머니가 더 이상 세월에 맞설 의지도, 생에 대한 애착도 남아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고, 내 느낌에 못을 박아주기라도 하듯 오래지 않아 아빠와 할머니는 이곳에서의 생에 작별을 고했다.
그러니 어쩌면, 끊임없이 치고 올라오는 흰머리에 내가 저항하는 것은, 단순히 나이 듦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흰머리의 집요함에 맞서고 생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함, 내 삶을 꽉 붙들고 있겠다는 마음을 끌어올리는 적극적 행동일지도 모른다. 늘어가는 주름을 감추느라 보톡스를 '맞는'것에 비하면 머리칼에 내가 원하는 빛깔을 ‘입히는’ 것은, 전적으로 내 신체를 움직여 행하고 이끌어가는, 기특한 인간의지의 발현이 아닐는지….
뭐, 정신승리라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을 듯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