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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 어른도 ‘카르페 디엠’

by 지뉴

20대에 시속 20km로 가던 시간이 30대에는 30km, 40대에는 40km로 간다지만, 10대 아이들과 40대 어른들에게 같은 속도로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있다.


“시간이 아까워!”


요즘 우리 집에서, 아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종종 터져 나오는 말이다.

나른한 오후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지탱하고 있는 아들도, 밤샘 근무를 마치고 몰려드는 잠을 밀어내는 짝꿍도 공통적으로 외치는 말. 여자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휴일 아침,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해 일찍 일어나지 못한 딸아이도, 새벽으로 깊어가는 어둠 속에서도 눈을 부릅뜬 나도 현실의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리고 싶어한다. 물론 24시간 내내 그러한 것은 아니다. 달팽이가 기어가듯 더딘 시간의 속도가, 어느 순간 32비트 리듬의 추진기라도 달린 듯 느껴질 때 솟구치는 바람이다.


잠으로 보내는 밤 시간이 아깝다고 말하는 내게 짝꿍은, “그게 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증거야.”라고 말했지만, 아직 성장기를 지나지 않은 아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을 보면 짝꿍의 말을 쉬이 수긍하기가 어렵다. 하루에 최소한 일곱 시간 정도는 잠을 자야 수명이 단축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들 하는데, 일곱 시간을 꼬박 채운 밤으로 연장되는 수명과, 짧아진 수면 시간 덕택에 향유하는 나만의 즐거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후자에 내 인생을 맡길 것이다. 직업적 연구자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을뿐더러, 잠으로 연장되는 생물학적 삶에 그다지 의미를 두고 싶지 않은 마음이기도 하고. 수명이 단축되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편애하는 특정 시간을 연장하고 싶은 욕망이 크다. 그리고 그 시간은 대체로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마치고, 하루 대부분의 일과가 끝난 무렵 본모습을 드러낸다. 밤잠을 줄이고자 하는 욕망이 내 안에 상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내 삶의 불확실성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년이 되면 모든 것이 안정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평범한 가정의 워킹맘으로서 아이들을 키우고 일상을 꾸려가며 굴곡 없이 무난하게 나이 들어갈 것이라고. 학창 시절 어른들의 말을 진리로 여기며 살아왔고 일탈을 시도해 본 적도 거의 없었으며, 최고의 신붓감이 가질만한 직업이라며 주변 어른들이 치켜세우던 (여)교사가 되었으니 모든 것이 바다를 향해 곧장 흘러가는 잔물결처럼 평온하고 안정적일 거라고. 하지만 막상 지금의 나는 이십 대를 통과해 오던 그때의 나처럼 불안정에 기대어 살고 있다. 정규직을 박차고 나와 비정규직의 삶을 살아가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청춘의 꿈을 다시금 꾸고 있다. 불쑥불쑥 불안한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나, 그만큼 가슴 뛰게 설레는 순간들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어느 길이 더 옳은 것인지는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전처럼 시간이 얼른 떠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확연히 작아졌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주말이 오기를, 얼른 이 계절이 지나가기를, 방학을 고대하던 마음에는, 그저 시간이 뭉텅이째 빠르게 굴러가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바람이 실려 있었다.


문득 스코틀랜드에서 알고 지내던 '알란'이라는 친구가 생각난다. 전형적인 스코티시 소년의 분위기를 풍기던, 당시 스무 살이었던 그는 늘 몸에 좋지 않은 것들을 달고 살았다. 기름에 튀겨낸 초코바, -악명 높은 스코틀랜드 음식 중에서도 튀긴 초코바는 최악이었다- 돌아서면 피워대던 줄담배를 그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직 소년의 티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어쩐지 인생을 다 살아버린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던 그가 비슷한 또래였던 내 눈에는 몹시도 이상해 보였다.


"너는 왜 몸에 안 좋은 것에 열심인 거야?"

나의 질문에,


"... 난 오래 살고 싶지 않거든."

라고 그는 답했는데, 그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대답이었다. 스무 살 소년이, 오래 살고 싶지 않아 의도적으로 단명을 촉진할 만한 것들을 가까이하고 지낸다니… 그러니까 그에게 튀긴 초코바와 줄담배는, 제 수명을 단축시키기 위한 소극적이며 장기적인 자살 행위의 수단과도 같은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겨울 하늘만큼이나 삭막해 보였던 그의 표정은, 그에게는 시간이 결코 아까운 것이 아니라 '빠르게 소멸'되기를 바라는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시점에 왜 불현듯 이 친구가 생각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그의 말과는 반대의 마음으로 내가 오늘을 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물리적으로 오래 살고 싶다기보다는, 가슴의 문을 활짝 열게 만드는 시간을 가능한 길게 누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아깝게 느껴지는 시간에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없는 것은, 그 시간만큼은 모두가 공평하게 발바닥이 얼얼해지도록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조금이라도 더 해가 천천히 기울기를 바라는 어린아이의 마음이 되기 때문일 거다. 그리하여 나는 소망한다. ‘시간이 아깝다'라고 외치는 순간들이, 어른과 아이에게 시간이 같은 속도로 흘러가는 순간들이 자주 도래하기를! 생의 끝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우리는 단지 오늘을 아낌없이 살아가야 하는 것일 테니.


오늘도 가만가만 읊조려 본다. 소녀시절 시인의 마음을 상상하며 속삭여보던 그 말을.

아이도 어른도 모두 삶이 내어주는 어여쁨과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때에 우리의 장미꽃 봉오리를 (아낌없이) 모으자고.

‘카르페 디엠!’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인용된 로버트 헤릭의 시 ‘To the Virgins, to Make Much of Time’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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