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게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장면 중 하나는,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길을 걷는 노부부의 뒷모습이다. 단절적 몇몇 단어로 묘사하기에는 무언가 한참 부족해 보이는. 온갖 갈등과 고초를 함께 헤쳐 나온 세월이 주는 무게가, 젊은 시절 그들을 찾아왔던 사랑의 열정, 시간과 함께 더해진 동지애적 다정함에 따스하게 녹아들어 있는 듯하다. 꼭 잡은 두 손에서는 서로의 마지막 가는 길을 결코 외롭고 쓸쓸하지 않게 하리라는 결연함마저 느껴진다. 길을 걷다 이따금 마주치게 되는 그들의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생각한다. 나도 훗날 나를 뒤따라 걷는 어느 젊은 부부의 기억 속에 저런 모습으로 남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지난 주말,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성지인 연남동에서도 나는 비슷한 생각을 했더랬다. 짝꿍과 처음으로 밤의 연남동을 걸으며, 우리의 목적지였던 카페로 향하기 위해 경의선 숲길 위로 난 좁다란 계단을 오르면서.
밤의 연남동에서는 낮의 그것에는 없는 차분한 열정이 스며 나왔다. 분위기 좋은 술집에서 들려오는 청춘들의 웃음소리가 따스한 봄밤의 공기 속으로, 어둠 속 촛불처럼 가만가만 빛을 밝히는 조명에 금세 묻혔고, 경의선 숲길은 흡사 막바지에 이른 크리스마스 마켓 같은 아련한 오라를 자아냈다. 한낮의 분주함이 가신 여운을 즐기고 있는 젊은 연인들은 다정하면서도 열정적이었다. 자꾸만 나의 이십 대를 소환시키는 그 모습들에 부러운 맘도 일었지만, 그렇다고 연남동이 청춘들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경의선 숲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청춘을 떠나 온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게들이 골목 여기저기에서 그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연남동의 주연 못지않게 멋진 조연의 역할을 하는 가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오늘 우리가 향하는 곳의 이름은 '섬(island)~'으로 시작한다. 왜 이름을 이리 지었을까, 독특하다 생각하며 무대에서 조금 먼 곳에 자리를 잡고 앉자, 칠흑 같은 긴 머리를 찰랑이며 중년의 주인장이 다가와 상냥하게 말을 건넨다.
"오늘 콘서트가 있을 예정이에요. 혹시 알고 오신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자 주인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가게이름보다 더 독특해 보이는 메뉴판을 가져다준다. 오늘 이곳에서는 기타 연주가 예정되어 있다. 더불어 연주자들과 친분이 있는 한 중견 배우가 게스트로 합류해, 미리 공지되지 않은 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 저음의 묵직한 목소리로 노래 한 곡조라도 뽑아내려는 걸까, 차오르는 궁금증이 공연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시원한 목 넘김의 기네스는 주말을 맞은 기분을 더욱 고조시킨다.
맞은편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낡은 LP판들과, 긴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는 중년 남녀들의 모습이 정겹다. 50대에서 70대로 보이는 이들이 음악과 예술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공감하는 장면은, 손을 꼭 맞잡은 노부부의 뒷모습처럼 감동을 준다. 예술을 이야기하며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가, 잠시 나는 생각에 잠긴다. 경의선 숲길의 가게에서 울려 나오던 젊음의 웃음소리 못지않게 그들의 미소에는 차분히 내려앉은 공기를 달뜨게 만드는 어떤 기운이 있다.
주변을 빙 둘러보니 어느새 가게 안은 초등학생부터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공연을 기다리는 이들로 세대를 아우르고 있다. 웅성웅성, 사람들의 기대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즈음, 오늘의 연주자들이 등장해 공연 시작 전 관객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몸풀기를 한다. 공연 순서를 정하기 위한 연주자들의 가위바위보가 관객들의 박장대소를 끌어내고, 이윽고 통기타와 클래식기타 연주가, 가뭄 끝 소낙비처럼 관객들 위로 쏟아져 내린다. 존 레넌을 닮은 통기타 연주자의 공연이 휩쓸고 간 자리에, 풍채 좋은 연주자의 클래식 기타 연주가 녹아든다. 그와 함께 중견 배우의 내레이션이 소설 속 문장들을 정성스레 꿰어 문학의 향기를 퍼뜨린다. 그제야 이곳이 왜 '섬~'이라고 명명되는지 알 것 같다. 열정적 공연에 곁들여진 술 한잔이 마치 나를 환상의 섬으로 데려다 놓은 듯하다. 현실의 걱정과 번민을 먼 세상 이야기처럼 공허하게 만들어버리는 이곳에 나는 마음을 온통 내주고야 만다.
열정이 폭풍처럼 휩쓸고 간 뒤, 박수가 잦아들고 난 후에도 나와 짝꿍은 한동안 자리에서 떠나지 못한다. 우리를 감싸고 있는 공연의 여운을 음미하며 마지막 한 모금까지 기울이고 나서야 천천히 가게를 나선다.
열정의 섬을 빠져나온 나는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나와 사뭇 달라진 느낌이다. 어둠이 짙어진 경의선 숲길의 봄밤은 다디달고, 드문드문 속삭임을 나누는 젊은 연인들은 더욱 애틋하다.
그들을 바라보다 문득 내 곁의 그를 올려다본다. 괜스레 가까이 다가서 손을 맞잡아본다. 언젠가 보았던, 어느 다정한 노부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