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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Sep 10. 2022

나 홀로 아일랜드에

‘우연’이 내게 선사해 준 그(것)들을 되돌아보며

내가 제일 처음 아일랜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영화 '타이타닉'을 보고 나서였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은 타이타닉 호의 3등 칸 승객이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1912년은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Potato Famine)' 이후 미국으로 향하는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행렬이 이어지던 해였고, 3등 칸 승객들 중에는 유독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많았다.

기네스를 마시며 아일랜드인들과 함께 춤추는 잭과 로즈. 리즈시절   디카프리오의 미모가 열일했던 장면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잭이 로즈(케이트 윈슬렛 분)와 함께 3등 칸에서 아일랜드인들과 함께 기네스를 나눠 마시며 집시 음악에 맞춰 흥겹고도 자유롭게 춤을 추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보며 어린 마음에 '나도 언젠가 기네스를 마시며 자유로운 방랑자의 시간을 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했더랬다.


그리하여 스코틀랜드에 머무르는 동안 아일랜드는 내가 필연적으로 가야만 하는 곳처럼 느껴졌고, 열흘이라는 시간이 주어지자 나는 특별한 계획 없이 홀린 듯 아일랜드 벨파스트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혈혈단신, 배낭 하나 짊어진 채로.  

벌써 오래전 일이다. 그렇지만 어떤 장면과 사건들은 일상을 살아가며 문득문득 얼마 전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내 기억 속 아일랜드가 그러하듯이.




* 벨파스트(Belfast)부터 더블린(Dublin)까지

타이타닉이 건조된 벨파스트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더블린으로 향했다. 벨파스트에서 더블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려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더블린에 도착하기 직전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버스에서 '탑로더'의 'Dancing in the Moonlight'이 흘러나왔다. 음악을 들으며 차창 밖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가로등 불빛을 머금고 내리는 비가 흡사 '달빛 샤워'인 양 느껴졌다. 밤 깊은 이국의 낯선 도시를 홀로 마주한 나는 긴장감 속에서도 음악에 취해 낭만적 감상에 젖어들었다. 그러나 그 감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숙소인 유스호스텔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여행객들의 짐들이 널브러진 좁은 실내는 온통 쿰쿰한 냄새와 습기로 가득했고, 공동 샤워실에는 물때로 인한 얼룩들이 오래된 무늬처럼 자리 잡고 있었으며 각양각색의 머리카락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굴러다니고 있었다. 빠듯한 주머니 사정에 맞추어 내 발로 찾아간 곳이었으니 '감내해야 할 경험’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히 그 상황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자비로운 3월의 햇살 때문이었다.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니 또 다른 싱글 배낭족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는데, 유스호스텔이라는 작은 공간은 지구촌 온갖 곳에서 온 에너지 넘치는 청춘들의 문화적 교류로 늘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즈음 더블린에서는 '세인트 패트릭 데이(St.Partrick's Day)로 인해 축제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햇살마저 이국적으로 느껴졌던 더블린의 3월. 초록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한 더블린을, 축제를 기념하는 녹색 옷을 입은 현지인들로 가득했던 거리를 배경 삼아 자유로운 방랑자처럼 발길 닿는 대로 걷고 또 걸었다.


영문학 시간에 접했던 아일랜드 출신 작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동상과 그 동상 앞 카페에서 우연히 알게 된 일본인 친구와 함께 했던 브런치의 맛도 특별했지만, 내게 있어 더블린은 리피 강(The River Liffey)을 건너 길 끝에서 우연히 마주친, 3월의 햇살이 내려앉은 아름다운 '트리니티 컬리지(Trinity College)'의 캠퍼스와 아이리시 펍에서의 시원 쌉싸름한 기네스의 맛으로 남아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을 형상화 한 동상들


더블린에서만 일주일 가까이 머물렀다. 21세기로 들어선 지 오래지 않았던 그때, 아일랜드 경제는 적극적으로 외국자본을 유치하며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었다. 더 이상 그 옛날 가난에 찌든 어둡고 피폐한 아일랜드의 이미지는 찾을 수 없었다. 특히 수도 더블린은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 및 일자리를 찾아온 동유럽 출신의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쳤다.


더블린에서 두 번째 묵었던 유스호스텔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헝가리 친구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그 친구는 한 달 치 숙박비를 미리 내고 그곳에서 장기투숙 중이었다. 그 방에는 헝가리 친구 외에도 몇 명의 배낭족들이 더 있었는데, 개중에 싱글 배낭족이었던 나, 그리고 미국인 친구 한 명이 대화 코드가 꽤 맞았다. 혼자 다니다 보면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이 생기는 것 같다. 때론 외롭고 누군가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혼자여서 더 자유롭고, 값진 인연과 경험들에 더 적극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치명적 매력이 ‘나 홀로 배낭여행’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이런저런 대화 속에서 우리는 우연히 '기네스'에 관한 얘기를 나누게 되었고, 셋 다 술을 꽤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헝가리 친구의 주도 하에 더블린의 한 펍에서 아일랜드 정통 기네스를 맛보기로 뜻을 함께 했다.


아일랜드 특유의 억양과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에너지로 가득했던 펍에서의 기네스 한 잔의 맛은 '시원 쌉싸름' 하다고만 표현하기엔 부족해 보이는 '그 무엇'이 담겨 있었다. 그때의 내게 그 순간의 기네스는 마치 '자유로운 삶의 정수'와도 같이 다가왔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 방랑시인이 되어 시 한수 읊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기분이었달까..


* 골웨이(Galway)

버스킹을 주제로 한 국내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도 등장했듯 골웨이는 길거리 곳곳에서 이어지는 버스킹으로 잘 알려진 아일랜드 서부 연안의 작은 도시로, 내가 영화 '타이타닉'을 보며 상상했던 아일랜드의 모습과 가장 근접한 분위기를 품고 있는 곳이었다.

사실, 처음부터 골웨이를 가려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우연히 손에 넣은 무료 여행책자 속 골웨이의 모습. 지구의 끝이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던 사진 한 장이 내 마음을 흔들었고 나는 무작정 골웨이행 버스표를 끊었다.


내게 골웨이는 모헤어 절벽(Cliffs of Moher)의 강풍과 내게 문화적 충격을 안겨 준 미국인 커플들로 기억되는 도시이다.

모헤어 절벽의 전경

모헤어 절벽은 영화 '해리포터'와 아일랜드 보이밴드 ‘웨스트라이프'의 '마이 러브(My Love)' 뮤비의 배경으로, 아일랜드 특유의 스산한 듯 초현실적인 자연 풍경이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유스호스텔에서 골웨이로 가는 버스투어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직접 예약도 가능하다-


내가 그곳을 방문한 때는 지극히 아일랜드적인 흐린 하늘 아래 몸을 제대로 가누기 쉽지 않을 정도로 바람이 거센 날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길은 제대로 된 울타리 하나 없이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나 있는 게 아닌가! 바람에 휩쓸려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아 가슴이 좁쌀만 해진 나는 네 발 짐승이 되어 조심조심 길을 올랐다. 그런데, 내 앞을 올라가던 미국인 커플은 절벽 끄트머리에서 강풍을 마주한 채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네 발로 걷던 나와 꿋꿋이 직립하고 있던 그들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그 순간, 죽음마저 불사하며 자유를 만끽하는 듯한 그들의 대담함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약 기운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던 걸까 싶을 정도로 무모했던 커플이었다 싶지만.


계획 없이 간 골웨이 유스호스텔에서 나는 남녀가 혼숙하는 방으로 배정되었다. 그곳에서 나는 또 다른 미국인 커플에 의해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밤이 깊어갈 무렵, 침대 구석에 피곤한 몸을 누이고 낯선 환경 속에서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어둠 속에서 당황한 듯 나지막이 반복적으로 소리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Get off!(손 떼!), get off!"

 나지막하다고는 하나 한밤의 정적이 감싸고 있던 그 방에서 여자의 목소리는 공기를 뚫고 또렷하게 들려왔다. 처음에는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둠 속에서 제 기능을 잃은 시력 덕분인지, 평소와 달리 마치 초능력자가 된 듯 극강으로 상승된 청력은 듣고 싶지 않은 미세한 소리마저 감지해냈다. - 내 호기심이 청력의 기능을 끌어올린 건지도 모르겠다 -


반복되던 여자의 목소리 뒤로 보채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잠시 후,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이상한 신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상황 파악이 되었고 기습적으로 다가온 문화적 충격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들을 멈추게 하기 위해 무슨 기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도-지금 생각하면 쓸데없는 고민이었다-됐지만 충격적 상황에 몸이 얼어버린 듯 나는 손끝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그 방에 있던 다른 배낭족들은 이미 잠이 든 건지, 아니면 그들에겐 그다지 놀라운 상황도 아니었던 건지, 그도 아니면 성실한 청중이 되어 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던 건지, 미국인 커플이 내던 소리를 제외하면 방 안의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지나칠 정도로 자유로웠던 미국인 커플 배낭족들은 내게 신선한(?) 충격과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내 생애 다시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돌이켜보면 피식 웃음 짓게 만드는, 추억거리를 내게 남겨주었으니 말이다.




삶은 종종 계획한 것보다 뜻하지 않게 마주한 것들에서 특별한 기억을 남겨주는 것 같다. 홀로 한 아일랜드 여행이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도 계획하지 않음으로 얻게 된 '반짝이는 우연의 순간들' 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경험들 있지 않나, 우연히 듣게 된 누군가의 말 한마디, 스치듯 마주했던 사람이, 장면 하나가 신기하리만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아 내 역사의 한 페이지를 고집스럽게 차지하고 있는 느낌을 받을 때가.


청춘을 떠나보내고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주로 '계획적인 여행'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이지만, 언젠가 한 번쯤은 그 시절 아일랜드에서의 나처럼 틀에 가두지 않은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또 다른 반짝이는 순간들을 맞이해보고 싶다. 돌아보며 미소 한 모금 지을 수 있는 그런 순간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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