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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Oct 13. 2022

달밤체조의 즐거움

나는 오늘도 달린다

달밤에 체조하냐?


사람들은 흔히들 격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는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도 살면서 여러 번 들어본 문장이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참 이상한 표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겐 '달밤'과 '체조'가 무척이나 어울리는 조합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단 1분이라도 더 눈꺼풀을 붙인 채 있고 싶은 새벽 시간이나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대낮에 비해 달빛 은은한 밤이 체조하기에 최적인 시간이지 싶었다. 비록 '달밤에 체조'를 몸소 실천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러다 최근에 '달밤체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심신의 건강을 위해서.

나름 잘록했던 허리가 스트레스 해소의 미명 하에 후하게 이어지던 ‘밤술’로 점점 크기를 키워가는 것에 대한 경각심도 있었지만, 밤 9시 무렵이면 하는 텔레비전 방송을 보다 보면 자꾸만 혈압이 솟구쳐 올라서였다. 해서, 집에 엉덩이 붙이고 늘어져 있길 포기하고 과감히 집 밖으로 나섰다.


집 근처에는 자그마한 개천과 그 주변으로 달리기 좋은 트랙이 있다. 트랙 한 바퀴 길이는 대략 320미터. 열 바퀴만 돌아도 무려 3.2킬로미터를 뛰는 것이니 내 허리에 영역을 넓혀가는 군살을 처치하기에 최적의 장소이지 싶었다.

달리기에는 나름 자신감이 있었다. 학창 시절 줄곧 반대표 계주 주자였고, 운동회 때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지 못하면 무척 자존심 상해했던 기억이 선명하기에.


그리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트랙을 향해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학창 시절은 다시는 내가 닿지 못할 과거란 걸 차마 깨닫지 못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단거리 달리기와 오래 달리기는 태생적으로 다른 장르란 걸 미처 인식하지 못한 채.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바퀴를 돌면서 이미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열 바퀴는 고사하고 다섯 바퀴를 돌기 전에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무정한 세월 탓인가, 서글픔이 밀려드려는 찰나 트랙 주변을 돌고 있는 다른 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멈춰 서 숨을 고르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문득 드는 생각...

처음부터 너무 욕심 내지 말자. '속도'보다 내가 '목표한 거리를 완주'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달리자.


그렇게 마음먹고 조금씩 꾸준히 '페이스 조절'을 해가며 나만의 달리기를 이어갔다.

열흘쯤 지나자, 두 바퀴도 한 번에 제대로 뛰지 못했던 처음과 달리 열 바퀴 정도는 무리 없이 뛸 수 있게 되었다. 용기를 내 조금씩 바퀴 수를 늘려갔다.

그런데  두세 바퀴쯤이면 ' 넘어가는 고개'  어김없이 찾아왔다.   바퀴가 극복해내야  중차대한 고비처럼 느껴졌다. '  이겨내지 못하면  인생에서도 그러리라' 쓸데없이 비장한 각오가 솟아 나왔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다 보면  달릴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보이지 않는 ‘ 무엇 이겨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달렸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숨이 차지 않았다. 정말로! 수다를 떨면서  수도 있겠단 생각이  정도로.


그런데 인생이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않은가.

숨이 차지 않자 이번엔 다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고개 너머 고개였다. 열 다섯 바퀴를 넘어가자 다리가 당기고 후들거렸다. 달리는 중간에 무릎이 팍, 하고 접힐 것만 같았다.

그러자 또 달리기를 인생에 접목시키고자 하는 거대 담론이 내 안에서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 다리 아픈 걸 가지고 내가 목표한 스무 바퀴를 완주하지 못하면 나는 앞으로의 내 생애 그 무엇도 제대로 해내기 힘들지 모른다는. 달밤에 체조를 하며 이렇게까지 비장해질 일인가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이 흘러갔다.




'달밤 달리기'를 시작한 지 오늘로써 40일이 되었다. 지난밤 스물 두 바퀴, 7킬로미터를 쉼 없이 뛰었다. 안정적 호흡과 아픔 없는 다리의 활약으로.

이제는 '견뎌냄' 보다는 '즐거움'에 가까운 마음으로 달리고 있다.

처음엔 뛰느라 급급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이제 보이고 들리기 시작한다. 평화로운 밤하늘과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우아한 달빛. 그리고 상쾌한 가을밤 공기를 두드리는 규칙적인 내 호흡 소리와 함께 지표를 디디는 경쾌한 발의 리듬이.

밤과 내가 빈틈없이 온전히 공명하는 것 같은 느낌에 표현하기 힘든 무엇인가가 가슴 가득 차오른다.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성취감에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신선한 희열을 느낀다. 심신의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란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가 생겨난다. 이렇게 계속 달리다 보면 ‘하프 마라톤'에도 도전할 수 있겠다는.


비록 지금의 내겐 학창 시절 100미터를 쏜살같이 가르던 그 속도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할 스스로의 '속도를 조절'할 줄 아는 능력과 목표지점까지 완주하는 '끈기'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앞으로 남은 인생도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아.. 결국 또 달리기와 인생을 연결 지어 결론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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