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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만 기억하려 드는 비인간적 세상

by 지뉴

‘나의 대화 예절은 몇 점일까요?'


아이가 일주일에 한 번씩 해가는 글쓰기 과제의 이번 주 주제이다.

아이의 숙제가 곧 학부모의 숙제가 되곤 하는 우리나라 교육 실정상, 아이는 거의 매주 나와 함께 과제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결론을 도출해 숙제를 완성한다.

그런데 이번 주 과제는 보자마자 한숨부터 나왔다. 아이도, 보조자인 나도 도무지 과제를 수행할 의욕이 생겨나지 않았다.


대화 예절이면 예절이지 거기에다 점수를 왜, 어떻게,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붙이라는 걸까?

과제를 받아 들고 어리둥절해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엄마인 나는 왠지 모를 뾰족한 감정이 슬금슬금 치밀어 오르다 급기야는 사춘기적 반항심이 되살아나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버렸더랬다.

OO아, 우리 그냥 몇 점이라고 점수만(!) 적어서 낼까??

순간 '불량 엄마'로 돌변해버린 내 표정을 살피던 아이가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꼬리를 흐리며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이 분명 집에 가지 말고 학교에 남으라고 하실 텐데...."


정량평가가 아닌 정성평가가 권장되어가고 있는 요즘, 아이의 대화 태도마저 스스로 '점수화'하라는 과제가 실로 시대착오적인, 아니, 구시대적 발상이다 싶었다.

가뜩이나 뒤로 후퇴해가는 요즘 정치 상황도 못마땅한데, 우리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에게마저 이런 고리타분한 과제를 내주는 게 과연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일까, 하는 강한 의구심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어렸을 적부터 어떤 대상의 가치를 점수로 매기고 수치화하는 교육을 받고 자라난 아이들이 과연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날 수 있을까, 염려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물론, 나 자신도 '대상을 수치화하고 보려는' 습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나는 20세기에 대부분의 교육 과정을 겪은, 아이들 말에 의하면, 그야말로 '옛날 사람'이 아니던가.

AI와 경쟁하며, 다양한 콘텐츠로 승부하는 21세기를 살아갈 아이들은 대상을 바라보는 눈이 20세기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창의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아이들은 친구들 간에 서로의 집 '평수'를 물어보며 자신이 속한 집단을 서열화한다고 한다.


어린이들마저 집이란 공간이 지니는 가치를 '평'으로 수치화하는 사회,

내신 점수와 수능 점수에 오롯이 삶의 초점을 맞춘 채, 성장기 인간의 예민한 감수성이 억압된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는 사회.

이런 사회가 맞이할 미래는... 치열한 경쟁 속에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운, 진정 AI가 지배하는 세상이리라.


대학시절, 캠퍼스 한 귀퉁이에 모여 지나가는 여학생들의 외모를 점수로-쟤는 A, 쟤는 B+...식으로 - 매기는 남사친들의 얘기를 듣고 살짝 충격을 받았더랬다. 그 순간 '한우 등급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게는 사람을 점수로 매기는 행위와 한우를 등급으로 매기는 행위 모두 별반 다르지 않은, 비인간적 행태로 보였다. 등급이 매겨진 채 식탁 위에 오르는 한우와, 남학생들의 '입방아 도마'위에 점수로 등급화 되어 오른 여학생들의 외모가...

물론 철없는 마음에 단순히 재미 삼아 한 행위일 것이다. 등급이 매겨진 당사자들이 들으면 충분히 분노할 만한 일이지만.


이처럼 개인들이 타인들마저 수치화하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건 결국 이 사회가 강요한 비인간적 교육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아이의 과제를 접하고 문득 멀지 않은 미래에 공식적으로 인간이 등급제로 분류, 표기되는 사회가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개개인의 개성이 살아있는 자유로운 시선과 인간미 넘치는 따스한 마음일 것이다.

숫자에는, 숫자로 데이터화하는 것에는 인간보다 AI가 훨씬 더 능통하고 최적화되어 있으니.




끝내 아이 과제에 대화 예절 ‘점수' 따위는 적지 않았다.

아이가 친구네 집을 28평, 38평이 아닌,

귀여운 강아지 두 마리가 친구와 함께 놀기 좋은 집,

책장이 갖가지 종류의 책들로 가득해 호기심을 자극하는 집,

커피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어 기분이 좋아지는 집,

마음과 눈을 즐겁게 만드는 풍경이 예쁜 집…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그런 마음을 품고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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