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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과 죽음 사이에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난 후

by 지뉴

짝꿍의 생일이 돌아왔다.

그 옛날 열렬히 데이트하던 청춘시절에는, 생일이면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사라질 정도의 손 편지를 고이 적어 고심 끝에 고른 생일선물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전하곤 했었지만 이제 짝꿍과 나 사이엔 '그런 의식’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아이들과 지지고 달달 볶으며 살아가는 일상에 치여 살아가다 보니 우리의 생일쯤은 그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그냥 지나쳐도 무방한 날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집에서 유일하게 공감할 수 위치에 있는 나라도 생일을 챙겨줘야겠다는, '짠함'과 '의무감' 사이 그 어디메쯤의 마음가짐으로 올해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짝꿍에게 제안했다.


영화의 제목은 '인생은 아름다워'.

예전에 동명의 외국영화를 무척 감명 깊게 보긴 했으나,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결합한 영화라고 해서 처음에는 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이문세의 주옥같은 노래들을 배경으로 하는 '주크박스 뮤지컬'- 기존에 있는 노래를 활용하는 뮤지컬- 영화라는 걸 알게 되었고 1차로 마음이 동했다. 결정적으로 보겠다는 결심을 서게 만든 건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출신 남자 배우가 나온다는 사실이었다. 이 정도면 짝꿍을 위한 선물인지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헷갈리기는 하지만, 짝꿍이 좋으면 내가 좋은 거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하는 후덕한 마음으로 오래간만에 극장으로 향했다.


영화는 생각 이상으로 슬펐고 생각 이상으로 웃겼다.

포스터와 제목만 봐서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경쾌하게 노래로 풀어내는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킹덤’에서의 이미지는 깔끔하게 세탁해버린 채, 훈련소를 들어가는 장면에서 연대장 포스를 뿜어내던 류승룡 배우의 시종일관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연기가 일품이었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짝꿍도 나도 먹먹해진 가슴을 안고 극장을 나섰더랬다.

우리가 느끼기에 이 영화는 '청춘'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청춘과 죽음이라는, 정반대에 서 있을 것 같은 이 두 단어가 서로를 품었다 밀어내기를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인생을 엮어나가는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랄까...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육체적) 청춘은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무렵까지를 일컫는다.

이런 '절대적 청춘'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나와 짝꿍은 영화를 보고 나서 왠지 가벼운 마음이 될 수 없었다.

서로의 절대적 청춘시절을 함께 나누며 시작한 인연이지만 조금씩 '파뿌리'가 되어가고 있는 서로의 머리칼 한 올 한 올을 목도하며 느껴지는 동지 의식, 헛헛함, 짠함, 애틋함 등의 복합적 감정들이 마치 영화의 거대한 후폭풍처럼 몰려와 '하...'라는 감탄인 듯 한탄인 듯 알 수 없는 속 깊은 한 글자를 내뱉게 만들었다.


그 마음을 안고 그날을 차마 그냥 아무렇지 않게 마무리할 수 없었던 우리는 밤이 깊어가기 전 분위기 좋은 와인바로 이끌리듯 발걸음을 향했다.

새빨간 와인 한 잔에 청춘을, 핏빛 와인 한 잔에 죽음을, 혀끝을 녹이는 안주 한 점에 우리를 감싸고 있는 풍경을 음미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눴더랬다.


문득 나중에 돌아보면 인생이 한 편의 '꿈'처럼 느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지 않은 일인 듯 생생한, 우리의 청춘을 수놓았던 그 많은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벌써 이만큼이나 멀어져 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인 걸 보면, 우리에게 결코 오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는 먼 훗날의 세월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성큼 우리 앞에 다가와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청춘과 죽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은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3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때때로 '죽음'에 관해 꽤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던 것 같다.

멀게만 느껴졌던 그 녀석이 어느 시점 이후로 바깥 원에서부터 과녁 중간에 있는 나를 향해 점점 가까이 날아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는 느끼지 못했던 '죽음의 생생함'이 친구 부모님의 죽음, 이모와 아빠의 죽음을 겪으며 점점 배가되어 갔다.

이따금 짝꿍은 주장한다. 우리가 자연이 주는 풍경과 감흥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되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이 자연과 가까워지고 -그의 말에 의하면 자연=죽음이다- 있다는 뜻이라고. 그의 말을 궤변이라고 일축하곤 하지만 사실 꽤 그럴싸한 얘기다 싶다.


내가 때때로 죽음에 관해 생각해보는 것은 결국 죽음을 너무 무거운 존재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더 '잘 살고' 싶어서이다.

'청춘'이라는 단어가 주는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감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잿빛으로 죽음을 인식하기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자연스럽게 이 세상의 일원이 된 것처럼 억지스럽지 않게 이생에서 퇴장하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죽을 건데 뭘 그렇게 열심히 살아?라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향유'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기 때문이다. 돌아서면 배고플 걸 알면서도 뭘 그리 잘 챙겨 먹어?라고 말하지 않고, 음식을 정성스럽게 요리하고 오랜 시간을 투자해 맛집을 찾아다니고 또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그 마음으로 인생을 살고 싶어서이다.


생각해본다. 인생이 한 편의 꿈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앞으로 더 많은 내 인생의 장면들을 나누고 싶다고. 비록 내 몸속의 음식물을 눈앞에 꺼내놓고 보는 것과 같은 기분에 '사랑한다'는 말은 잘 내뱉지 못하지만, 그저 따스하게 안아주고 애틋함을 가득 담아 이마를 쓰다듬어주는 그 마음으로 함께 살아나가고 싶다고. 얄미운 행동에 때때로 '머리'가 '머리통'으로 보이는 한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영화를 곱씹어보며 영화에 삽입된 곡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문세의 '알 수 없는 인생(2006)’을 듣고 또 들었다. 시적인 가사가 나에게 닿아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았다.


' 언제쯤 사랑을 다 알까요/ 언제쯤 세상을 다 알까요/ 얼마나 살아봐야 알까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아직도 많은 날이 남았죠/ 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테죠/ 알 수 없는 인생이라 더욱 아름답죠...'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다. 사랑을, 세상을, 인생을 다 알고 싶지는 않다고. 그런 날이 오리라고 결코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 알아버리기 전에 이 세상과 평화롭게 작별하고 싶다. 알 수 없는 인생이라, 끝을 모르는 인생이라 더 아름답기에...


영화 덕분에 좀 더 인생에 너그러워진 마음을 품고 내일을, 또 그다음 내일을 잘 살아가야겠다. 이 영화가, 그날의 우리의 대화가 준 여운을 붙들고 계속해서... 하지만 짝꿍에게 한 가지는 얘기해주고 싶다.

나는 극 중 염정아 같은 19세기 현모양처 스타일은 아니라서 내 눈앞에 세탁물을 던져대는 이를 눈감아 줄 위인은 못 되고, 혹여라도 내가 먼저 이 세상 하직하더라도 '꼭 좋은 사람 만나 쓸쓸하지 않게 살라'는, 신보다 더 포용 넘쳐 보이는 말 따위는 해 줄 위인은 더더욱 되지 못한다고. 대신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갈 거라고.

"내 생각하며 남은 인생 즐기면서 살아. 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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