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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계속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

by 지뉴
엄마, 요즘은 왜 술 안 마셔?


초등학생 아들이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달밤의 러닝'을 시작하면서 술을 마시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비가 오니까, 왠지 울적해서, 어쩐지 기분이 좋아서, 오늘따라 달빛이 은은해서... 등의 갖가지 핑곗거리를 대며 밤이면 술잔을 기울이던 엄마의 모습에 익숙해져서인지 아이는 술을 멀리하는 듯한 요즘 엄마의 태도가 꽤 낯설어 보였던 모양이다.


아이가 던진 뜻밖의 질문에 그동안의 내 음주문화를 반성하게 되었다. 그동안 밥 먹듯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이 앞에서 술을 대한 건 아니었는지 말이다. 그래, 지금처럼 앞으로도 쭈욱 술을 가급적 자제하면서 살아야겠다, 라는 생각이 든 순간 뒤이은 아이의 말을 듣고 난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회심의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엄마, 나 스무 살 되면 같이 재즈바 가서 포도주 마시기로 약속했잖아. 그런데 이렇게 술 안 마시다 그때 가서 엄마가 술 마실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으면 어떡해...? 그때쯤이면 엄마 나이도 많을 텐데, 나랑 술 마시자는 약속 못 지키는 거 아니야?


아, 그랬다!! 난 얼마 전에 아들과 약속을 했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되는 해 -앞으로 아홉 해가 남았다- 함께 재즈바에서 엄마와 같이 인생 첫 와인을 맛보자고. 멋진 드럼 연주자와 재즈 피아니스트와 자유로운 스캣을 넘나드는 보컬이 있는 재즈바에서 말이다.


아직도 술에 낭만의 추억을 얹고 싶어 하는 이 철없는 엄마가 무심코 던진 말을 아이는 고맙게도 마음속에 꾹, 눌러 담고 있었던 것이다. 10년쯤 후면 나도 어엿한 오십 대. 알코올을 대하는 체력이나 내성이 지금만 못할 것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이렇게 술을 멀리해서야 성인이 된 아들과의 소중한 첫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장담하기 쉽지 않으리라.




유전적인 요인이 심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술은 평소 마시는 횟수, 양에 따라 ‘한계 주량'이 정직하게 비례하는 종목이다. 짧지 않은 세월 술과 함께한 내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모범생 병'에 걸려 있었던 나는 대학 입학 즈음까지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알코올계에 최적화된 인간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소주에 과일 맛이 섞인 '과실주'를 통해 알코올의 축복이 이끄는 신세계를 처음 접했고, 그 자리에서 한 병을 기꺼이 홀라당 마셔버렸고, 내가 알코올에 꽤 친화력과 방어력이 있는 인간이며 앞으로 이 녀석과 밀접해질 거대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알코올의 세계에 입문한 이후 주기적 흡입을 유지했던 내 주량은 이십 대 중반이 될 때까지 16도 소주 2병 반까지는 무리 없이 마실 수 있는 정도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사회생활 시작과 동시에 재미없는 회식 자리에서 최대한 술을 자제하며 내 주량은 한없이 쪼그라들었고, 지금은 와인 한 잔에도 대학 시절 소주 1병 이상 마신 것 같은 효과를 충분히 낼 수 있는 몸이 되었다. 물론, 세월이 더해준 시너지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반성한다. 더 이상은 내 주량이 초라해지지 않도록 운동은 운동대로 열심히, 술은 술대로 꾸준히 마시겠다고. 잠시 잊고 있었던 술에 대한 나의 로망과 아이와의 소중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혹시 아나, 몇 달 전 드럼을 시작한 아이가 미래의 그 와인바에서 나와 첫 와인잔을 기울이다 환상적인 즉흥 드럼 연주를 보여줄지.

아... 상상만 해도 가슴 떨리게 낭만적인 그림이다!!


아이의 기억 속에서 약속이 희미해지기 전에 각서라도 받아두어야겠다.

그리고 아이가 잠들면 슬며시 꺼내 들어야겠다. 얼마 전에 사두었던, 냉장고 한켠에서 핑크빛의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나의 ‘X Rated’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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