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스토리 인 에든버러

by 지뉴

이것은 하연의 첫사랑과 첫 경험에 관한 이야기다.


하연이 그녀의 첫사랑, 성준의 모습을 처음 본 곳은 청춘의 열기로 가득했던 런던의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버스 터미널)'이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한 대학 부설 어학원에서 연수중이었던 하연은 여름방학을 맞아 홀로 떠난 런던에서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그녀의 숙소가 있는 에든버러로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에든버러로 향하는 심야 버스는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여름 페스티벌*을 즐기려는 젊은 남녀들과 그들이 나누는 낯선 언어들로 떠들썩했고, 그 낯선 분주함은 오히려 하연의 마음을 한층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불현듯 익숙한 고국의 언어가 그녀의 귓가로 날아들었고,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을 향했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런던의 여름 햇살만큼이나 따사로워 보이는 미소를 머금은 그가, 친구로 보이는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연이 한국을 떠나온 건 일 년 전이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넷. 학교를 졸업하고 방황을 거듭하던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지내리라는 특별한 계획 없이 고국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마음만이 간절했다. 사람에 대한 믿음도 사랑에 대한 기대도 더 이상 자신에게 남아있지 않는 것 같았던 그녀는, 완전히 낯선 곳에서 먼지 한 톨만큼의 희망이라도 찾고 싶은 절박함으로 에든버러에 발을 내디뎠다.



그랬던 하연이 성준의 눈을 처음 마주한 순간, 그가 "혹시, 한국 사람이세요?"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 그 찰나의 순간, 그녀의 가슴속 응어리져있던 '그 무엇'이 보드랍게 바스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 제가 한국 사람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하연이 물었다.


- 아, 그 가방이요… 한국 사람들이 애용하는 거잖아요…. 하하~


성준은 천진한 웃음소리를 내며 하연의 가방 한쪽에 수 놓인 마크를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더랬다.

그들이 첫 대화를 주고받은 건 축제의 아침이 밝아오던 에든버러의 하늘 아래에서였다. 그 순간 축제의 들뜬 에너지로 가득했던 에든버러의 시내 중심가, 프린세스 스트리트(Princes Street)에 우뚝 선 대관람차가 마치 그들의 만남을 축하하기라도하는 듯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이는 대관람차를 따라 하늘로 향했다. 상쾌한 스코틀랜드의 여름 하늘 아래 어디에선가 백 파이프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하연은 그제야 자신이 스코틀랜드의 한 복판에 돌아와 있음을 실감했다.


- 여기를 잘 아시는 분 같은데, 실례가 안 된다면 안내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성준의 친구가 물었다. 그 순간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성준의 곁에 있는 사람이 남자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문득 하면서.



그들은 에든버러 성이 올려다보이는 카페로 갔다. 카페명 'The Elephant House'. 카페 한편에서 이름 모를 영국의 한 작가가 그의 첫 작품을 끄적이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를 지닌 곳이었다. 작가 J.K. 롤링도 수급자의 신분으로 이곳에서 '해리포터'를 탄생시켰다고 했었던가.

처음 만나는 한국인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들은 통성명을 하고 간단한 서로의 배경을 교환했다. 하연은 이런 자리가 불편했지만 한편으론 성준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다. 방학을 맞아 친구와 함께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온 성준은 오래전 이곳에서 아버지가 유학을 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스코틀랜드에서 유학을 했을 정도면 꽤 유복한 집안이리라, 하연은 짐작했다. 그래서 그의 표정에서 구김살 하나 보이지 않았던 걸까, 하연은 괜스레 마음이 쓸쓸해졌다.



그날 그들은 청춘의 자유로움을 마음껏 발산하며 축제의 장에 녹아들었다. 중세시대의 올록볼록한 골목길들이 아기자기 뻗어있는 구시가지를 방랑자처럼 누비고 다니며 마음껏 웃고 함부로 떠들었다. 마음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그 모든 무게가 홀연히 실려나갈 정도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한 로열 마일(The Royal Mile)을 걷고, 웨이벌리 브리지(Waverley Bridge)에서 노란 이층 버스를 타고 북해의 바다를 만나러 갔다. 칼톤힐(Calton Hill)에서 노을에 고즈넉하게 젖어들어가는 에든버러의 풍경을 함께 마음속에 담았다. 하연의 인생에서 그날만큼 마음이 가벼웠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성준 앞에서 자유로이 얘기하고 거리낌 없이 웃으며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했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인 ‘밀리터리 타투’공연

그날은 에든버러 성에서 '밀리터리 타투'가 있던 날이었다. 전 세계 군악대들의 공연으로 이루어지는, 에든버러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밀리터리 타투는 밤 10시 반에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보슬비와 함께. 그때까지만 해도 하연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그날 밤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특별한 의미로 남을지를. 내리는 비에도 사그라들지 않던 사람들의 열정과 환희와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던 불꽃의 향연 속에서 그녀는 성준의 뒷모습을 문득문득 바라보았다. 보슬비를 머금은 채 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의 뒷모습에서 그의 표정을 보았다. 공연이 끝난 후 그녀를 돌아보며 얼굴을 밝히던 그의 눈과 입에서 그의 마음 하나하나를 읽어보려 애썼다. 이것이 마지막일까? 마지막이 아니라면….' 하연은 자신도 모르게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 우리 뒤풀이해요!


에든버러 성을 썰물처럼 빠져나오던 사람들 틈에서 흥에 달뜬 목소리로 성준의 친구가 말했다. 그 순간 하연은 성준과 눈이 마주쳤고 흔들리는 성준의 눈빛을 보았다.


- 야, 시간 너무 늦었어.


성준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하연은 그대로 집으로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 그래요. 우리 뒤풀이해요.


하연이 선뜻 대답했다. 그녀는 성준이 스스로의 눈빛에 반하는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운명 같은 사랑이었다. '운명'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처음이자 마지막을 하나의 순간으로 그러모으는 폭발적 감정이 그녀에게로 와락, 달려들었다. 그날 에든버러의 밤하늘을 수놓았던 불꽃처럼, 찰나를 움켜쥐었을 뿐이지만 오랫동안 마음을 사로잡는 잔상처럼 그녀와 그의 이야기가 그 밤 완벽한 공명의 순간으로 그녀의 가슴속에 아로새겨졌다.



성준의 숙소에서 셋은 함께 맑디맑은 스카치위스키로 잔을 기울였다. 이성보다 감성지수가 올라가던 그 순간. 시간이 더해질수록 그들의 표정은 긴장이 풀어져 격의 없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하연과 성준 둘만이 거실에 남게 되었고 그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오롯이 다시 만났다.


- 더 늦기 전에 가야 하지 않나요?


성준이 물었다. 그러나 하연은 느꼈다. 물음 끝에 여리게 주저하던 그의 목소리를. 생경한 용기가 그녀에게서 솟아 나왔다. 술기운에 더해진 불꽃같은 감정이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던 말을 그녀에게서 이끌어냈다.


- 어차피 버스도 끊겼고… 지금 가고 싶지는 않네요.


그 말을 하는 하연의 입술을 성준은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내 그의 눈빛이 촛불처럼 흔들렸고 하연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때였다. 성준이 하연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고 품 안 가득 하연을 그러안았던 순간이.

성준의 온기가 하연에게로 살포시 전해져 왔다. 하연은 웃음을 멈추고 성준의 따스함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그것은 지금까지 하연이 경험한 그 어떤 입맞춤보다 따스하고 성실했다. 성준의 손길이 마치 갓난아이를 씻길 때처럼 조심스럽게 하연의 몸을 쓰다듬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떨림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성준의 떨리는 손이 하연의 가슴을, 허리를, 이윽고 아래를 스쳐 지나갈 때 그녀는 나지막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마침내 그들이 서로를 한 꺼풀 한 꺼풀 내려놓았을 때 더 이상 둘 사이에 장벽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하나가 되어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슴 벅찬 설렘이 하연의 온몸을 감싸 안았고, 마침내 성준이 그녀의 몸속 깊은 곳에 다다랐을 때, 마치 엄마의 자궁 속을 부유하고 있는 아기가 된 듯한 편안함과 충만감에 기인한 원초적 본능이 성준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몸과 마음을 적극적으로 이끌어 주었다. 둘은 한참 동안 서로의 호흡을 깊이 빨아들이고, 격렬하게 몸을 탐하고 함께 신음하며 천국과도 같은 깊은 밤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더 이상 하연과 성준 사이의 경계는 느껴지지 않았고 둘은 하나의 생명체로 서로에게 온전히 의지한 채 지극한 환희의 하모니를 오래도록 발산했다.



다음 날 동이 트기 전, 하연은 성준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아스라이 내려앉은 새벽 안갯속 중세의 도시를 가르며 그들은 하연의 집까지 함께 걸었다. 수줍게 손을 맞잡은 채로.

헤어지기 전 성준은 아쉬운 마음을 여덟 자리 숫자에 꼭꼭 눌러 담아 하연에게 전했다. 그들에게 그 숫자는 약속이었다. 찰나의 추억을 영원으로 바꿀 수도 있는.


- 한국으로 돌아오면 연락해요, 꼭!


그 말을 남기고 성준은 하연의 집 앞 언덕길을 천천히 돌아서 내려갔다. 하연은 그 순간 자신의 표정이 어땠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남긴 처음이자 마지막 쪽지를 꼭 그러쥐었던 손의 감각을, 점점 작아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내려앉던 그 마음을 생생히 기억한다. 언덕 아래로 사라지는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하연은 보일 듯 말 듯 조그맣게 손을 흔들었다. 해사했던 그의 미소를 떠올리며….



* 에든버러 국제 페스티벌(The 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 - 매년 8월 3주간 스코틀랜드 수도인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세계적 공연 예술 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