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서 생긴 일

by 지뉴

'오늘 소설 속 이야기와 함께 한 1시간 40분, 즐거우셨나요? 오늘도 전 당신을 보며 힘을 얻습니다.^^'


쪽지다. 이번이 벌써 여섯 번째. 분명 화장실을 가기 전만 해도 없었다. 상영은 손목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상영이 화장실에 있었던 시간은 단 5분. 그 사이 쪽지를 상영의 자리에 두고 간 거라면 분명 쪽지를 남겨 놓고 간 그 '누군가'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얘기일 테다. 순간 그의 팔에 보일 듯 말 듯 소름이 돋아 나왔다.

상영은 사람들로 가득한 카페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슬리퍼를 끌고 와도 좋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동네 카페지만, 초록색 마크가 선명히 새겨진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은 평일, 휴일을 가리지 않고 늘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낸 후 둘러앉아 함께 수다를 나누며 육아 스트레스를 푸는 엄마들, 알콩달콩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젊은 연인들, 그리고 자신처럼 책이나 컴퓨터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나 홀로' 족들까지. 딱히 그에게 이런 쪽지를 보낼만한 사람은 보이질 않았다.

상영은 '도대체 누가 왜...?'라는 의문을 떠올리다 이내 누군가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이 번져와 자신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순간 그에게 '그래, 누군지 모르겠지만 누군지 모르는 채로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즐겨야 할 20대 청춘이지만 그의 요즘 하루하루는 활기 없이 무미건조하고 불안하게 이어지기만 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에게서 날아온 쪽지 하나가 그에게 미묘한 즐거움과 기대감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약간의 두려운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상영은 현역 병장으로 군대를 제대한 대한민국의 신체 건장한 20대 성인 남성이 아니던가.


상영은 카페에서 공부를 한다. 주로 영어를. 사실, '한다'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지 상영 자신도 자신이 없다. 영어공부는 카페에 앉아있기 위한 핑계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 때문이다. 그는 주로 '멍'을 때리고 책을 읽는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그런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도 문득 졸업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영어 점수를 떠올리면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옥죄어 오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이 땅 밖으로 단 한 걸음도 나가본 적 없는 태생적 한국인인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국어가 아닌 영어점수를 필연적으로 갈구해야 한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몇 달 전 군을 제대한 상영은 내년이면 대학 졸업반이 된다. 굼벵이 뒤꿈치처럼 시간이 더디 가던 말년 병장 시절에는 제대만 하면 하루하루 행복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지냈다. 그런데 졸업반을 앞두고 있는 그를 또 다른 불안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영에게는 이제 집도 예전만큼 편안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때때로 가족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게 되는 건 비단 자신의 성격 탓일까, 상영은 문득문득 스스로를 자책하곤 한다. 이런 상영에게 카페는 하루 오천 원이면 안락한 피신처가 되어주는 매우 고맙고 이상적인 유일한 장소다.


상영이 잠시 카페의 공간 속에 시선을 멈추고 멍을 때리고 있던 사이 한 사람이 그의 테이블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 안녕하세요!


주변을 의식한 듯 낮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위를 바라보던 상영의 얼굴에 실망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상영만큼이나 신체 건장한 남성이었다. 단정한 복장의 남자는 상영에게 함지박만 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로 무엇인가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빛을 받아 매끈거리는 종이 한 장과 휴대용 화장지였다.


'토익 점수가 고민이신 당신 저희를 믿고 따라오세요. 기적을 경험하게 해 드립니다!…'


근처에 새로 문을 연 영어 학원의 홍보물이었다. 처음 접해보는 공격적인 마케팅에 혀를 내두르기 직전의 상영에게 남자는 한 마디를 남긴 후 성큼성큼 뒤돌아 나갔다.


- 한 번 읽어봐 주세요!


돌아서기 전 그의 시선이 잠시 상영의 테이블 위에 놓인 토익 수험서와 소설책, 뒤이어 상영이 신고 있던 슬리퍼를 훑었고 거의 동시에 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서렸다. 상영은 불현듯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상영은 종이를 최대한 힘주어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뒤 휴대용 화장지를 자신의 가방 안 쪽으로 슬며시 밀어 넣었다. 광고 문구나 홍보 방식이 특정 종교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리고 가방을 챙겨 슬리퍼 속 발가락 끝에 힘을 준 채 당당한 걸음걸이로 카페를 나섰다.


그 후 며칠 동안 쪽지는 날아들지 않았다. 그러다 여섯 번째 쪽지를 받은 후 일주일이 지난날, 화장실을 다녀온 상영을 일곱 번째 쪽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상영이 펼쳐놓고 간 소설책의 중앙에 보기 좋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가 달랐다. 우선 쪽지의 크기부터가. 평소와 달리 거의 편지에 가까울 정도의 길이로 쓰인 글이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쪽지를 펼쳐 든 상영은 심장의 고동소리가 크레셴도처럼 점차 커져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마지막 쪽지가 되겠네요. 오늘 드디어 제 이야기가 완성되었어요.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입니다.

저는 소설을 쓰는 습작생입니다. 제 인생에서 유일하게 하고 싶은 일이 소설을 쓰는 것인데, 제게 희망을 주는 일이 가족에게는 '쓸데없는 일'로 비치는 것 같아 힘 빠지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토익책을, 자기 개발서를 제쳐두고 열심히 소설을 읽고 있는 당신을요.

당신을 보며, 그래도 내 얘기를 읽어줄 그 누군가가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게 용기를 주어 감사합니다. 아직은 당신을 마주하기가 쑥스러워 이렇게 쪽지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얼굴 뵙고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상영은 쪽지 너머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자신의 테이블을 방문했을 누군가를 찾아보려 애썼다.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누군가의 두 눈을 상상해 보며 조심스럽게 등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였다. 상영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오 미터 정도 떨어진 스툴 좌석에 있던 두 명의 남녀였다. 갈색의 긴 웨이브 머리의 여자 앞에는 노트북이,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남자 앞에는 책과 연습장으로 보이는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상영은 그중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는 말간 얼굴의 여자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소설을 쓰는 사람이라면 분명 노트북을 세워두고 있으리라. 그런데 상영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였을까, 그녀는 황급히 노트북 전원을 끄는가 싶더니 이내 짐을 챙겨 서둘러 카페 입구 쪽으로 걸어 나갔다. 상영의 시선이 멀어져 가는 여자의 뒤를 좇았다. 그 순간 상영의 머릿속에 쪽지 속 문구가 되살아났다.


'언젠가는 얼굴 뵙고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불현듯 상영의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점점 작아지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영은 결심했다. 앞으로 소설을 더 많이,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단지 자신이 하고 싶어 의도하지 않고 한 지속적인 일상 속 어떤 행동이 누군가에게 힘이 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영어공부를 위해 온 카페는 그에게 소설에 더 진심을 다하도록 만들었다. 역시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상영은 쪽지를 곱게 접어 소설책 중간에 책갈피 대신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스툴에 앉아있던 남자는 여성의 뒷모습을 좇는 상영의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보며 알 수 없는 흐뭇함을 느꼈다. 남자는 글자들이 휘갈겨진 연습장을 접어 넣고 잔 바닥에 얕게 남아있는 마지막 커피 한 모금을 천천히 들이켰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7'이라는 숫자가 주는 행운에 대해 반추해 보았다. 남자는 문득 다음 소설로 스릴러 장르는 어떨까, 누군가의 사생활을 몰래 지켜보는 관음증 환자에 관한 이야기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러고 난 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옆자리에 올려두었던 노트북 가방을 챙겨 카페 뒷문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향했다.

돌아서는 남자의 모습을 상영은 보지 못했다. 상영은 소설 속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막연한 희망을 가슴속에 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