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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힘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 3차전 관전 후기

by 지뉴

단 9퍼센트의 확률이었다.

그 누구도 우리가 강호 포르투갈을 꺾고 16강 티켓을 거머 쥐리라고는 쉬이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은 해냈다. 꺾이지 않는 마음과 정신력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경기 종료 시간은 다가왔고 경기는 그렇게 그대로 끝날 것처럼 보였다. 1-1 스코어. 이대로라면 우리의 16강행은 물 건너가는 상황이었다. 허나, 신은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돕는 자에게 기적 같은 선물을 안겨 주었다. 후반 46분, 손흥민의 70미터 가까운 질주로 시작된 최후의 반격은 황희찬의 발끝에서 환상적인 극장골(epic goal)로 마무리되어 포르투갈의 골대를 통쾌하게 갈랐다.

관중들은 열광했다. 북받친 감정에 눈물을 쏟아내는 사람들도 꽤 보였다. 내 마음도 덩달아 울컥했다. 지금 우리에게 놓여 있는 분열과 대립의 상황을 잠시나마 잊고 오롯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하나가 되던 순간, 이 나라를 아끼는 한 사람으로서 더없이 감격스러웠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우리에겐 최종적인 결과를 못 박아줄 8분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다.

같은 조 우루과이 대 가나전, 스코어는 2-0. 만약 남은 8분 동안 우루과이가 한 골이라도 더 넣는다면 우리가 그대로 탈락하는 상황이었다.

8분이 80분처럼 느껴지던 가슴 졸이던 시간을 지나 드디어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마침내 우리의 16강행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선수들과 관중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새벽 딸아이와 함께 두 손 맞잡고 휘슬이 울리기만을 기다리던 나도 그만 커다란 박수와 함께 소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곁에서 단잠에 빠져있던 아들 녀석이 화들짝 놀라 일어날 정도의 소란스러움으로.


이윽고 화면에 선수복을 뒤집어쓴 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우루과이 공격수 수아레스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나이로 봤을 때) 자신이 참가할 수 있는 마지막 월드컵에서 16강 탈락이라는 고배를 마시며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으니-그것도 생각지도 못했을 한국과 가나의 선전으로 인해-울음이 터질 법도 하겠다 싶었다.


의아했던 건 그 이후의 상황이었다.

2점 차이로 완패, 예선전에서 탈락하고서도 기뻐하는 가나 관중들의 모습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심지어 '코리아! 코리아!'를 외치며 우루과이 관중들을 향해 환호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이 미스터리한 광경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격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벌어진 사연을 듣고 나자 그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이 갔다. 어차피 한 점을 더 줬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경기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한 가나 선수들의 마음에는 '그들을 무시하고 사과하지 않는 자를 향해 오랫동안 축척된 복수심이' 날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12년 전인 2010년 남아공 월드컵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가나와 우루과이는 8강전에서 맞붙었다. 가나는 이 경기에서 이길 경우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4강에 진출하는 아프리카 팀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기는 1-1로 팽팽하게 이어져고 결국 연장전까지 가게 되었다. 그러다 연장 후반전 마지막 추가시간에 결정적 골로 이어졌을 가나의 헤딩슛이 나왔는데, 정확히 골문을 향해 날아가던 볼을 수아레스가 핸드볼 골키퍼를 연상케 하는 어이없는 손놀림으로 막아냈다.

결국 경기는 페널티 킥 상황으로까지 가게 되었다. 결과는 우루과이 4 대 가나 2. 가나는 고대했던 4강의 꿈이 좌절되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4년 간의 선수들의 피땀 눈물이 스포츠의 페어플레이 정신을 망각한 한 선수의 뒤틀린 욕심으로 인해 모멸당했고, 가나 국민들은 그 '모멸의 순간'을 결코 잊지 못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핸드 파울을 하고 있는 수아레스의 손

더 큰 문제는 그 이후 수아레스의 태도였다.

카타르 월드컵 우루과이-가나 전 직전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수아레스를 향해 과거 자신의 잘못에 대해 가나에게 사과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수아레스는 사과할 생각이 없다, 나는 그 일로 퇴장당했고 결국 가나 선수가 페널티킥을 실축하여 4강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오히려 패배의 원인을 가나에게로 돌리며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고 사과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시사했다.


가나 국민들의 그간 쌓여왔던 분노가 폭발했다.

가나 대통령마저 우루과이를 향한 복수에 대해 언급했고 가나 선수들은 '자신들이 (16강에) 올라가지 못한다고 하더라고 결코 우루과이가 16강에 진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전광판을 통해 (한국이 포르투갈을 꺾음으로써) 우루과이에게 한 점이 더 필요한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된 가나는 추가 8분을 포함 총 10여분의 시간 동안 온 힘을 다한 수비,시간 끌기용 선수 교체, 공 돌리며 시간 지연하기 등 총력을 다해 우루과이의 추가 득점을 막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우루과이의 16강 탈락이 확정된 순간, 가나인들은 자국의 탈락에는 아랑곳없이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우루과이를, 마지막 경기에서 눈물지으며 돌아서는 수아레스를 보게 되어 말이다. 누군가의 불행이 전 국민의 기쁨이자 행복이 되는 순간이었다.


수아레스가 진심 어린 사과를 단 한 번이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분명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우루과이가 우리를 제치고 16강에 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잘못된 순간적 욕심에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수아레스가 그것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사과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가나 국민들이 12년 동안 이토록 마음속으로 차곡차곡 단단하게 분노와 복수의 앙금을 쌓아 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국의 패배가 확정된 순간에도 상대편이 탈락하도록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안하다. 잘못했다.'

이 여덟 글자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이 세상엔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걸 못하는 인간들도 차고 넘친다.

상대를 배려하는 사과 한 마디가 그다지도 어려운 일인가.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 스스로가 못난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러한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어서일까? 그렇게 지켜내야 할 자존심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란 말인가!


이번 월드컵을 지켜보며, 함께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은 타인의 마음을 돌아보고 다독일 줄 아는 '인간애'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덟 자면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가 결국 8년, 80년이 이어지도록 잊히지 않고 증오와 복수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DNA에 각인된다.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고 모멸당한 마음은 끝내 죽기 살기로 맞서는 마음으로 나아가곤 한다.

부부싸움에 잊을만하면 등장하는 '당신 그때도 그랬잖아!' 레퍼토리도, 페어플레이를 강조하는 스포츠 경기에서 '내가 죽어도 너 잘 되는 꼴은 못 본다'라는 독한 마음을 품게 만드는 것도, 한 세기가 지나도록 대대손손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부정하고 미워하고 끈질기게 사과를 요구하게 만드는 그 마음도 결국은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난스럽게 올린 SNS상의 사과 한쪽이 아닌 진심 어린 사과 한마디의 크나큰 힘.

사과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역사를 뒤바꿀 수도 있는 결과를 몰고 올 거대한 잠재력을 지닌 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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