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욕이 일상화된 사회

언어로 실현하는 평등사회

by 지뉴

욕설(辱說):

- 욕되게 하는 말. 줄여서 '욕'이라고 하기도 함.

- 타인에게 모욕을 주거나 인격을 깎아내릴 때에 쓰이는 비속어로 점잖지 못한, 비도덕적 언행.

- 이따금 사람들이 서로 친근할 때 간단한 추임새나 감탄사처럼 사용하기도 함.




우리는 지금 '욕'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인 미취학 어린아이들부터 나이 지긋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욕을 쉽게 접하고 때로는 그 욕을 본인 스스로 구현해내는 그런 사회 말이다.


생각해보면, 사전상에서 비도덕적이라고 명명되는 욕이 이렇게까지 널리 쓰이고 있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분명 저급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흠 없는 언어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비속어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입에 착착 감기는 그 '찰짐'과 그것들을 입 밖으로 뱉어낼 때 얻어지는 통쾌한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일 거다.


때때로 내 아이들 입에서 터져 나오는 '시'로 시작하는 두 글자 욕설에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뜨지만 크게 분노하지 않는 것도 기본적으로 그 마음을,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나 자신도 욕에서 자유롭지 못할뿐더러. - 격정적이고 변화무쌍한 이 나라의 도로 위를 달리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내 입에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들에 나 스스로도 깜짝깜짝 놀라게 되곤 한다 -


낯선 외국어를 배울 때에도 처음 접하는 단어나 표현들은 몇 번의, 때로는 십 수 번의, 기억상실 과정을 반복해서 겪은 후에야 겨우 터득이 되는데 반해, 특정 비속어들은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척척 습득되어 필요할 때(?)마다 맛깔스럽게 탁탁 튀어나오곤 한다.

예를 들어, '꺼져'라는 말에 해당하는 외국어 표현들 이... 영어만 해도, Fxxx off, Pxxx off, Bxxxxx off 등으로 다채로운데 어찌 그리 머릿속에 쏙쏙 들어와 박히던지 신기할 따름이다. 물론 'Get lost' 같은 좀 더 도덕적(?) 느낌을 주는 표현도 있지만 이 녀석은 왠지 입에 잘 감기지가 않는다.


이탈리안 친구가 몹시 궁금해했던 우리말 표현 중 하나도 욕과 관련된 것이었다. 모국어 욕 표현들을 상호 교환하면서 우리는 더 격의 없이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 친구에게서 인상 깊게 배운 이탈리아 표현중 하나가 'Vaffanculo(바팡쿨로)'였는데, 뜻은 둘째치고 한두 번 듣고도 그 발음이 입속에 부드럽게 엉겨붙어 우아하게 굴러가는 느낌에 내 발음기관과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되었더랬다. - 이탈리아 특유의 ‘팔’로 표현하는 욕설도 함께 병행해야 그 맛깔스러움이 배가된다. 이 표현의 뜻은 저 위에 있는 영어 표현들과 동일하다 -

문득 드라마 '빈센조'속 주인공 송중기의 입을 통해 이 표현을 듣고 추억을 떠올리며 반가워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위와 같이 쓰고 보니 내가 마치 욕설(비속어)을 장려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이제부터는 진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으려 한다.


앞에서 언급한, 욕설이 가지는 자그마한 긍정적 작용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욕(비속어)을 쓰지 않도록, 욕이 습관처럼 형성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특히 욕을 쓰는 당사자가 타인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공적이고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첫 시작에 적었듯 욕은 기본적으로 타인을 깎아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 쓰는 언어는 곧 그 사람의 수준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식을 했든 부지불식간이든 자신의 저급한 언어 구사로 인해 타인이, 대중들이 불쾌감과 모멸감 혹은 자괴감 등을 느끼는 상황을 만든다면 그 자체로, 크든 작든, 용서를 구해야 마땅한 '죄'가 된다.


최근 일련의 사태들을 지켜보며 내 귀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상황이 내 나라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에. 마치 세종대왕님이 무덤을 박차고 나와 한글 공부 좀 제대로 하라고 백성들에게 비속어를 날리시며 호통치는 장면을 보는듯한 충격을 받았다고나 할까.


오래전 봤던 마지막 토익시험 이후 처음으로 자발적 듣기 평가를 하고 또 했다. 그런데 한국어 듣기 평가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지위 좀 있으신 분께서 텔레비전에 나와 '다시 들어보라'고 해서 열심히 들어보았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회의감을 눌러가며. 이래 봬도 학창 시절 한 '성실'했던 사람으로 해봐야겠다 싶은 걸 하라고 하면 무지하게 열심히 해보는 유형의 인간인지라…


그런데 아무리 마음을 비우고 듣고 또 들어보아도 , 신뢰와는 담쌓기로 작정한 듯 파란만장하게 변화하는 그들의 변명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해서, 결론 내렸다. 지금 이 나라의 수장은, 정부는 욕(비속어)을 통해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려는 것이라고. 그런 의도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나라 국민임이 X팔려서 맨정신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여전히 어떤 한 사람의 발화 속 문장 몇 개만 듣고도 그 사람의 성장 배경이나 사회적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홈스테이 주인집의 중학생 아들이 쓰던 말과 영국 총리의 발언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이미 중2병이 시작된 우리 아이가 쓰는 말과 이 나라의 수장이 쓰는 말에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세대와 성별과 지위를 초월한 '언어로 실현하는 절대적 평등사회'가 아닐까 싶다.


p.s. 혹시 이 글에서 내가 쓴 비속어들이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준다면 미리 사과드린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살면서 뼛속 깊이 느낀 것 중 하나가 ‘손절’과 ‘인정’이 필요하다 싶을 땐 가능한 한 빨리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 그것이 결국 본인을 구하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이므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