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작가의 대면 북토크에 다녀왔다. 코로나 시국 이후 처음이었다. 외향적인 성격 때문에 코로나 시기가 너무 힘겨웠다는 박상영 작가-이후 박 작가-는, 마음속에 갇혀있었을 말들을 유머에 실어 거침없이 쏟아내, 북토크에 참석한 독자들의 웃음보가 시종일관 빵빵 터지게 만들었다.
동성 간의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소설 속에 녹여내는 박 작가의 북토크 였던지라 토크 중간중간 자연스럽게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다뤄졌다.
진행을 맡았던 김이나 작사가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나의 우주를 창조해내는 일'이라고 말하자 박 작가는 몸서리를 치며 사랑의 감정을 너무 거창한 것으로 다루지 말아 줄 것을 부탁하며 '사랑은 단지 호르몬이 일으키는 작용일 뿐'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의 말에 일정 부분 공감을 하면서 실로 오래간만에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최근에 텔레비전에서 연애 리얼리티쇼들이 넘쳐난다. 한정된 채널 안에서 올 한 해만 총 20여 개의 매칭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니, 채널을 돌릴 때마다 인터넷 사이트를 습격하는 팝업창들처럼 왜 이렇게 자주 짝을 지은 젊은 남녀들이 나타나는지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해진다. 왜 유독 요즘 이런 프로그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걸까? 이것도 일종의 인구수 저하를 최대한 막아보고자 하는 국가 차원의 자구책 같은 걸까.
개인적으로 이런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진다. 뭐랄까, '커플 매칭'이라기보다는 '짝짓기'의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고나 할까. 흡사 ‘동물의 왕국'에서 동물들이 본능적 욕구에 의해 이성 간에 구애하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남녀 간의 사랑을 방송이라는 매체를 통해 강력하게 소비하고 있기 때문일 거다. 이렇게 소비되는 사랑의 대부분은, 사랑의 초기 단계에 있어 중요한 '플라토닉 사랑'이 생략된 채 '에로스'적인 긴장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물론 에로스적 사랑도 사랑의 중요한 형태이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은 무릇 상호 간의 순수한 정서적 교감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흔히들 남용하는 '사랑한다'는 표현에서 거품을 걷어내고 사랑이라는 감정의 '엑기스'를 살펴본다면 '설렘', '애틋함' 등의 정서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은 대게 ‘플라토닉 사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사랑의 감정이 단순히 이성 간의 사랑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해서, 일명 BL(Boy’s Love), 백합 또는 GL(Girls’ Love)로 대표되는 동성 간의 사랑도 분명 사랑의 한 형태로 존중받아야 할 대상이리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있는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우리나라의 '춘향전'도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이루어지기 힘들었기에 더 절절하게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래서인지 박 작가의 작품 속 사랑이 커플 매칭 프로그램 속 이성 간에 오가는 감정보다 더 애틋하게 다가온다. 작품 속 그들은 그들의 사랑이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 이루어지기 힘든 것임을 알면서도 그 강력한 힘을 거스르지 못한 채, 자신이 깨지고 상처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를 오롯이 폭풍 같은 감정 속으로 내던진다. 그 감정에 상대방의 조건 같은 계산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오로지 애틋한 사랑만이 간절하고 가슴 절절한 감정의 결정체로서 작용한다.
이성과 결혼해 평범하게 살고 있는 나이지만 나도 한때 스스로의 성적 취향에 혼란을 겪은 시기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이후 내 첫사랑의 대상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아이였다. 여중, 여고를 나온 나이기에 그 대상은 당연히 나와 같은 성을 가진 여학생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눈앞에서 그 아이를 마주치게 되면 나는 눈도 제대로 못 맞추고 심장이 마구 방망이질 쳤더랬다. 커져가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나는 고민을 거듭하다 어느 날 자필 편지로 그 아이에게 고백이란 걸 했다. 대범하게 '사귀자' 는 아니었고, 소심하게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 뭐 이런 내용을 적었던 것 같다. 편지와 함께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을 예쁘게 포장해 그 아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 서랍에 몰래 넣어두었다. 용기 내어 고백을 하고도 무지 걱정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가 나를 미친 애 취급 하지나 않을까, 같은 교실에 있기 불편해지면 어떡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친구는 내가 느꼈던 감정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단순히 내가 친구로서 잘 지내자고 싶어 한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우리는 꽤 오랫동안 좋은 친구로 지냈다.
돌이켜보면, 지극히 보수적인 부모님의 이성관이 내 ‘성 정체성 혼란’에 큰 역할을 했던 듯하다. 당시 부모님의 말에 의하면, 남자아이들은 대학교 들어가기 전 내가 절대로 만나면 안 되는 대상이었다. 내게 있어 학원에서건 어디서건 마주하게 되는 남학생들은 범접하면 큰일 날 '관상용 생명체들'이었고, 한창 사춘기 호르몬으로 충만해가던 내 마음은 같은 반 여자 아이에게로 그 크기를 키워나갔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일까, '첫사랑'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그때 당시의 내 풋풋하고 설레던 감정을 제일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래,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일종의 사랑'이었다. 그 어떤 감정보다도 순수했던.
실제로 애틋하고 가슴 절절한 사랑은 지속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호르몬에 의해 유발된다고 한다. 이 호르몬이라는 강력한 녀석이 감정을 통제하는 우리의 뇌 일부를 마비시키고 흥분시키기 때문에 우리 눈에 콩깍지가 씌고 그(녀)가 무엇을 해도 용서가 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슴 들끓는 불꽃같은 사랑을 한 커플이라도 결혼을 하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하게 되면 호르몬 감소와 함께 '우애', '동지애', '전우애'와도 같은 변화된 감정으로 여생을 함께하게 된다는 말은 충분히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성의 영역을 마비시키는 호르몬 작용으로 시작되는 '순수한 감정 덩어리'로서의 사랑은 시간이 가면서 다른 복합적인 요소들이 결합되어 좀 더 이성적이면서 성숙한 사랑으로 발전된다는 것이리라.
이러한 사랑에 있어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성'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호르몬이 신의 영역만큼이나 크고도 숭고하게 작용하는 동안만큼은, 사랑의 감정을 나누는 둘 사이에 '새롭고도 크나큰 세상'이 창조된다는 점에서는 모든 커플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특정 종교 집단의 일부 사람들이 동성 간의 사랑을,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없어져야 할 쓰레기 취급하는 걸 보면 울컥할 때가 있다.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한 신이 있다면 분명 모든 것을 아우르는 포용적이고 관용 넘치는 존재일 텐데, 신의 이름을 빌어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상처 주고 손가락질하는 그들의 모습이 참..비겁하고 편협해 보인다.
그 누구도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사랑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재지 않는 순수한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 자기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일으키게 되는 것이고 그러한 감정은 우리가 거스를 수 없는 절대적인 에너지로부터 자연스럽게 유발되는 것이다. 모든 순수하고 열정적 사랑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불륜과 같이 3자의 마음에 치명적 고통과 아픔을 주는 사랑이 아니라면, 이 사회에서 비난받아야 할 사랑이란 없으리라.
가뜩이나 순수한 사랑이 퇴화되어가는 이 각박한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