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문(Blue Moon) : 보름달이 한 달에 두 번 뜨는 현상. 두 번째 뜨는 달을 ‘블루문’이라 칭하며 이러한 현상은 2,3년마다 한 번씩 일어난다.
혜인이 블루문 오피스텔 1003호에 입주한 건 6개월 전이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진 후 새로운 삶을 찾아 헤매던 그녀는, 친구와 우연히 들르게 된 카페 근처에 있던 블루문 오피스텔의 모습에 이끌려 오래 생각지도 않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녀의 삶에서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처음 본 블루문 오피스텔의 모습은 낯설지가 않았다. 언젠가 조카가 보던 애니메이션 '신비 아파트'에 등장하던 아파트처럼 평범한 듯하면서도 독특한 기운이 서려있는 건물이었다.
블루문 오피스텔에서 혜인이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곳은 네 개의 오피스텔 동으로 둘러싸여 있는 중앙홀과, 자칫 어두워 보일 수 있는 홀에 끊임없이 빛을 전해주는 높은 유리천장이다.
햇살 좋은 주말 오후, 혜인은 중앙홀 난간에 세탁한 이불을 털어 널고 빛으로 무늬져 있는 홀 주변의 하얀 벽을 내려다보며 한참 동안 멍을 때리곤 한다.
일요일 오후였다. 혜인은 10층 난간에 기대 중앙홀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다 문득 등 뒤로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그러나 혜인이 뒤를 돌아봤을 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도대체 이 느낌은 무얼까?'
혜인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깊이 생각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기만 하는 혜인이지만, 이날만큼은 시간이 흐를수록 형체 하나가 또렷이 그녀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택배였다. 이상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던 것의 정체는. 며칠 째 블루문 오피스텔 1004호 앞에는 생수병과 택배상자가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혜인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음을 듣지 못한 지도 여러 날 되는 듯했다. 최근 며칠간 불면증이 조금 나아진 이유가 그 때문일까, 혜인은 문득 생각했다.
혜인은 1004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여기로 이사 온 지 반년이 지난 그녀가 1004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주기적으로 생수와 택배를 주문하고 긴 단발머리에 특이한 반지를 한 기다란 손가락을 지녔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대단한 사랑꾼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1004호가 단발머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지난여름 우연히 열린 문틈으로 고개 숙인 채 방바닥을 닦고 있던 1004호의 모습을 보고 난 후였다.
그 외 혜인에게 1004호는 소리로만 기억되는 이웃이었다. 때때로 들려오는 요란한 음악 소리, 화장실 변기에서 물이 내려가는 소리, 뒤꿈치를 울리며 방을 서성이는 발자국 소리와 밤이면 들려오는 특이한 목소리로.
혜인은 제대로 1004호의 음성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1004호와 마주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잠 못 드는 밤이면 불면을 부추기는 1004호의 소음을 따지고 싶어 지다가도 한편으론 자신이 은근히 1004호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즐기고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혜인은 의사가 처방해 준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 옆방 이웃의 사생활쯤은 내 알바 아니라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곤 했고, 다음 날 아침이면 지난밤 일은 잊은 채 다시 말개진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쌓여가는 1004호의 택배가 혜인의 심경을 건드렸다. 문 앞에서 고스란히 몸집을 불려 가고 있는 생수통과 택배 상자들이 마치 과속방지턱처럼, 빠르게 지나가던 혜인의 시야에 밟혔다. 호기심을 떨치기 힘들었던 혜인은 가만히 1004호 앞으로 다가가 처음으로 택배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받는 이' 란에 '박*우'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비록 두 글자, 미완의 형태였지만 처음 마주한 1004호의 이름이었다. 혜인은 '우'로 끝날만한 온갖 여성의 이름을 떠올려봤다. '서우, 지우, 연우...' 그러다 더 이상 생각나는 조합이 없자 그녀는 가만히 1004호의 문에 귀를 대고 혹여라도 들려올 소리 한 끝이라도 건져보겠다는 심정으로 청력을 온통 집중시켰다. 그러나 문 안쪽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분 여정도 그 상태로 멈춰서 있던 혜인은 누군가 문을 젖히고 나오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짧은 호기심을 거둬들이고 다시 그녀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혜인의 기억으로 그녀가 1004호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건 사흘 전 목요일 아침이었다. 사실, 목격했다고는 하지만 그날 혜인이 본 건 1004호의 손이 전부였다.
전날, 오래간만에 들른 재즈바에서 과음한 탓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정신없이 출근길에 나서던 혜인은, 낮게 흥얼거리는 노랫소리와 함께 택배상자를 집안으로 들이던 1004호의 야릇한 손의 자취를 좇았다.
별로 특별한 게 없는 손이었다. 약지를 두르고 있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한 독특한 문양의 반지를 제외한다면. 그럼에도 혜인이 야릇한 손이라고 느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1004호에서 밤이면 들리는 소리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 소리가 길고양이들이 절실하게 짝을 찾는 울음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귀를 기울일수록 소리는 다양하게 변주되어 혜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느 날엔가는 더위에 지친 개가 헐떡이는 숨소리처럼, 또 다른 어느 날엔가는 격정적인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환희에 찬 교성처럼 다가왔던 소리의 정체를 혜인은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소리가 들려올 때면 혜인의 머릿속에 이미지 하나가 반복적으로 떠올랐다.
아스라이 비치는 파리한 달빛아래 서 있는 나무들이었다. 촘촘하고 가느다랗게 매달린 가지들이 마치 오래된 덩굴처럼 얽혀 서로를 자신에게로 옭아매고 있는 듯한 모습의... 밤이면 그녀의 머릿속에 나타났다 사라지던 그 이미지는 이제 햇빛 쨍쨍한 한낮에 불쑥, 현실처럼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말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이상한 소리에 시달린 다음 날 오후, 혜인은 난간에 기대 햇살에 젖어들어가는 거대한 홀 벽을 쳐다본다. 어느 순간, 지난밤 보았던 나무의 이미지들이 마치 초현실파의 데칼코마니처럼 고립된 형태로 벽 위로 생생하게 솟아오른다. 그 모습에 혜인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나 이미지는 이내 자취를 감추고 마음이 다시 평온해진다. 요즘 혜인은 종종 이 알 수 없는 환영과 감정의 굴곡에 내버려진 채 묘한 기분으로 주말을 마감하곤 한다. 그런데 탑처럼 쌓여있던 택배상자들을 봤던 그날은 어쩐 일인지 무심한 정적 속에서도 잠들기 직전까지 나무들의 잔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두 명의 경찰이 혜인을 찾아온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경찰을 보자마자 그녀는 그들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1004호 때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1004호 앞의 택배들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 1004호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나요?
좀 더 젊어 보이는 경찰이 혜인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 글쎄요. 한 열흘쯤 된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보셨을 때 인상착의나, 혹시 이상한 느낌 같은 건 받지 않으셨는지...?
혜인은 1004호의 마지막 인상착의를 묻는 경찰에게 어떻게 답해야 할지 난감했다. 혜인의 머릿속에 온전한 1004호의 인상이란 사실상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뜸을 들이던 혜인은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 사실, 얼굴을 본 건 아니고... 1004호의 '손'만 봤을 뿐이라 딱히 인상착의를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손만 봤다는 혜인의 말에 경찰들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혜인은 혹여 자신이 일말의 의심이라도 받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 그런데 1004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요?
- 실종 신고가 들어와서 수사 중입니다. CCTV상으로는 열흘 전쯤 중앙홀에 서 있던 모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1003호 분께서 1004호와 친분이 있으신 것 같아 혹시 알고 계신 사실이 있을까 하여....
순간 혜인은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1004호와 친분이 있다'는 건 도대체 무슨 말일까?
- 친분, 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죠, 전 1004호 얼굴도 모르는데요?
젊은 경찰이 잠시 옆의 동료와 얘기를 나누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 선생님께서 1004호에 들어가는 걸 봤다는 이웃이 있습니다.
- 네?! 누군지 모르겠지만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신 모양이네요.
경찰의 말에 당황한 혜인은 1004호에 대한 목격담보다는 자신이 1004호와 얼마나 무관한 사람인지 경찰을 납득시키느라 한동안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 일단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이후에 생각나는 것이 있으시면 여기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경찰은 명함 한 장을 건네며 혜인이 서 있는 뒤편 배경을 재빠르게 훑었다. 사라져 가는 경찰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혜인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자꾸만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1004호에 대한 궁금증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경찰이 돌아간 후 혜인은 고심에 빠졌다. '일단' 알겠다,라는 경찰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1004호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 열흘 전 목요일이 확실한지 찬찬히 되짚어봤다. 혜인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책상 서랍 속 다이어리를 뒤적였다. '재즈바'라고 기록되어 있는 그 전날과는 달리 목요일은 공란으로 남겨져 있었다. 역시, 숙취에 시달리던 그다음 날 아침에 본 게 그녀가 기억하는 1004호의 마지막이었다. 이윽고 책장을 덮으려던 순간, 혜인의 눈에 다이어리 귀퉁이에 흐릿하게 그려진 그림 하나가 들어왔다. 혜인의 기억 속에는 전혀 없는, 하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그림이었다. 잠시 그림을 바라보던 혜인은 무언가에 이끌린 듯 연필 하나를 집어 들어 다이어리 위에 그어진 선들을 찬찬히 따라 그려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그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