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문 오피스텔 - 2

by 지뉴

그것은 혜인에게 떠오르던 이미지였다. 때로는 환영처럼 때로는 현실처럼. 이제는 실제인지 꿈인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하는. '왜 이 그림이 다이어리에 그려져 있는 걸까?'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떠오르는 장면이 없었다. 과음으로 기억이 희미해졌던 그날의 자신이 그렸던 걸까? 경찰이 돌아간 후 불안해졌던 그녀의 마음이 두려움으로 번져갔다.


혜인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냉수 한 잔을 숨 가쁘게 들이켰다. 그 순간 경찰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중앙홀에 서 있는 모습이 1004호의 마지막이었다는 말이. 그녀는 홀을 한번 둘러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고, 블루문 오피스텔로 이사 온 후 처음으로 중앙홀의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그녀의 예상대로 홀에 별다른 흔적 같은 것은 없었다.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했던 거대한 홀에 발 딛고 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리천장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잔뜩 낀 회색빛 하늘에서 드문드문 가느다란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구름 뒤편의 해가 마치 달빛을 내리고 있는 듯한 날씨였다.


이윽고 그녀는 시선을 좁혀 1004호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지금 1004호는 텅 빈 채 고요히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10층 복도를 지나가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흘끔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허공에서 그녀의 눈과 만났다. 낯설지 않은 시선이었다. 10층에 사는 사람이라면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쯤 마주쳤으리라. 이내 당황한 듯한 모습의 그 사람은 복도 안 쪽으로 황급히 멀어져 갔다. 혜인도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려 흐린 빛이 서려있는 홀의 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햇살 밝은 날의 벽과는 무엇인가가 달라 보였다. 확연히 바뀐 건 없었다. 날씨 때문에 달라진 빛의 세기만 제외한다면. 혜인은 한동안 가만히 선 채로 벽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어쩐지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마음이 공허해졌다. '외로워 보여... 무언가가 필요해...' 백지상태의 벽이 그녀의 마음을 옭아매는 듯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서 있는 그녀 옆을 작은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두 남녀가 지나갔다. 즐거워 보이는 그들을 쳐다보던 혜인의 머릿속에 또다시 이미지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그녀는 그림을 완성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이어리 속에 희미하게 그어져 있던 선들을 온전하게 마무리지어야겠어. 연필이 아닌 붓으로, 좀 더 크고 부드러운 형태의 완전한 그림으로.'


며칠 후 혜인은 미술학도로서의 꿈을 접은 지 십 수년만에 다시 화방을 찾았다. 오래간만에 찾은 곳이었지만 그 옛날 그녀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익숙한 냄새 속에서 혜인은 다시 소녀로 돌아간 듯 가슴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녀는 그림과 함께 했던 시절을 마음속으로 재현해 보며 다채로운 색상의 미술용품들을 눈으로 음미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화방 귀퉁이에 매달려 있는 키 큰 붓 하나가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흡사 공중으로 부양한 채 멈춰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같았다. 그녀에게는 별 쓸모가 없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화방을 한 바퀴 돌아 물건들을 고르고 계산을 마칠 때까지도 붓의 잔상이 그녀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장식용으로라도 쓰겠다는 마음으로 키 큰 붓을 구입한 뒤에야 가게를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혜인은 오래간만에 붓을 들었다. 어색함인지 설렘인지 알 수 없는 감정에 혜인의 손끝이 떨려왔다. 그녀는 텅 빈 종이 위에 천천히 그림을 채워나갔다. 두 그루의 나무가 서로를 마주하고 있는 모습을. 떨어진 채 고고히 서 있던 나무들은 이내 그녀의 붓 끝에서 점점 얽히고설킨 모습으로 하나가 되어갔다. 땅속에 박혀 있었을 뿌리들이 드러나고, 자라나던 가지들이 상대를 향해 간절하게 뻗어나갔다. 어느 시점부터 그림은 혜인의 손길을 떠나 스스로의 의지로 완성되어 가는 듯했다. 문득 두려워진 그녀는 붓을 멈추고 미처 완성되지 못한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두 그루의 나무로 시작했던 그림은 점점 인체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림을 보던 혜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쩐지 그녀의 눈에 그림은 더 큰 공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녀는 붓을 내려놓고 미완성의 그림을 서랍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적막이 내려앉은 그녀의 공간 속에서 억지로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떠 보니 낯선 번호로부터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가족, 친구들과도 연락이 점점 뜸해지는 요즘 문자보관함마저도 빈곤해지고 있던 참이었다. 혜인은 스팸 문자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남겨둔 채 문자를 확인했다. 그것은 재즈바에서 고객들을 상대로 보낸 메시지였다.


'블루문이 뜨면 당신만을 위한 공연이 시작된다... 당신을 특별한 밤으로 초대합니다!’


며칠 후 블루문이 뜨는 날 특별한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많은 관심을 부탁한다는 요지의 메시지였다. 날짜를 보니 토요일 밤이었다. 혜인은 출근 준비를 서두르며 최근에 들렀던 재즈바 풍경을,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보려 했다. 그러나 안개에 갇힌 듯 희미한 기억은 자꾸만 그다음 날 봤던 1004호의 손에서 맴돌았다. 혜인은 문자 내용을 찬찬히 다시 훑었다. 그녀의 시선이 '블루문'이라는 단어에서 멈춰 섰다. 블루문은 실제 달의 색깔과는 관련이 없다고 했지만, 그녀의 뇌리에는 파리한 달빛이 반복적으로 연상되었다. 블루문과 특별한 밤. 혹시 떠오를지 모를 그날의 기억. 그녀는 문자 내용을 되새기며 재즈바를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혜인의 일상에서 재즈바는 그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이따금 재즈바를 갈 때면 혜인은 늘 혼자였다. 그녀에게 '사치'는 외로움과 어울리는 대상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나누지 않는 것. 눈치 보지 않고 홀로 마음껏 쓸 수 있는 시간과 돈과 같은 것. 조금 취하고 흐트러져도, 거리낌 없이 자신이 선택한 헐거움을 즐길 수 있는 순간. 그렇다고 혜인은 이제껏 기억을 잃을 정도로 자신을 내버려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 의아했다. 유독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찾은 재즈바는 평소보다 사람들로 붐볐다.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기 전 보컬이 피아노 연주에 맞춰 가볍게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리허설하고 있었다. 무대 뒤편에는 파란 빛깔의 커다란 보름달이 세팅되어 있었고, 무대 측면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 나와 연주자들을 담배연기처럼 감싸고 있었다. 혜인은 예약해 둔 자리에 앉자마자 이탈리아산 와인 한 병과 올리브가 들어간 샐러드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재즈가 흐르고 있는 와인과 함께 몸도 마음도 금세 느슨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혜인은 이완된 표정과 몸짓의 사람들을 둘러보며 음악에 취하고 술의 녹녹한 기운에 빠져들었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무대 위 연기가 점점 짙어져 갔다. 흐려지는 시야에 혜인은 잠시 눈을 감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가 그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 오늘도 혼자 오셨나 봐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혜인은 눈을 뜨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포니테일로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남자가 서 있었다.


- 저를, 아세요?

- 글쎄요, 안다고도 할 수 있고 모른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혜인이 아무 말 못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오늘 그쪽과 처음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니까 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쪽에 대해서 아는 것은 별로 없으니 모른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 순간 혜인은 확신했다. 기억이 흐릿한 그날에 이 남자와 대화를 나눈 것이 분명하다고. 그 생각이 들자 혜인은 남자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아졌지만 조금 창피한 마음이 일기도 했다. 그녀의 기억에서 지워진 시간 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일을 벌였을지 도통 알 수 없었기에.


- 우리가 무슨 말을 나눴었나요? 제가 기억이 잘 안 나서요...


남자는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혜인의 눈을 바라봤다.


- 별 다를 건 없었어요. 그냥,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들이요... 어차피 우리는 다 외로우니까요. 인생의 시작과 끝이 그런 것처럼.


남자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혜인의 비어있던 잔 가득 와인을 따랐다. 그때 남자의 오른손을 두르고 있는 반지가 혜인의 시선에 와 닿았다. 특이하지만 혜인에게는 익숙한 모습의 반지. 태곳적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을 뱀의 모양을 닮았을 그것. 얼마 전 1004호의 손 위에 놓여 있던 바로 그 반지였다. 흠칫 놀란 혜인은 남자의 머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뒤로 가지런히 묶인 포니테일이 단발머리 정도의 길이로 보였다.


- 저는 외롭다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는데요?


혜인이 표정을 감추려 애쓰며 무심한 듯 말했다. 남자가 가만히 혜인의 눈을 들여다봤다.


- 별로 솔직하지 못하시네요... 아닌 척하지 말아요. 그럴수록 더 고독해질 뿐이에요. 그러고 싶지 않아서 이곳을, 저를 찾아온 게 아니었어요?

-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혜인은 앞에 있던 잔을 들이키며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주머니 속을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혜인이게 내밀었다. 구겨진 종이 위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혜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그림이.


- 이 그림을 제 방에 남기고 가셨더라고요. 이걸 보고 있는데, 왠지 마음이 위로가 되었어요. 이 나무들이요. 우리를 닮은 것 같으면서도 외롭지 않아 보여서 좋았어요.


혜인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급하게 들이켠 알코올 기운이 번지면서 머리도 시야도 흐려져가는 듯했다.


- 괜찮으세요?


옆으로 기울어지며 무너져 내리는 혜인을 남자가 두 손으로 받쳤다. 남자의 손이 몸에 닿던 그 순간 혜인의 머릿속 깊은 곳에 입력이라도 되어있었던 듯 장면들이 불쑥 튀어나와 빠른 속도로 그녀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1004호의 문. 복도 끝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이웃집 여자의 무심한 듯 집요한 시선.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쓸쓸하게 드러난 남자의 새하얀 육체. 그녀를 훑던 남자의 애달프던 손과 따뜻했던 숨의 리듬. 외로움을 밀어내던 가느다랗고도 거친 소리... 그것은 단지 꿈이었을까, 수면제와 알코올이 만들어낸 환영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부인하고 싶어 하는 실체와도 같은 것일까? 혜인의 가슴이 불현듯 떨려왔다.


- 두려워하지 말아요. 외로움이 참을 수 없는 임계점에 이르는 순간이 오면 언제든 이렇게 찾아오면 돼요.


혜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 마음껏 마셔요. 오늘도 제가 친구가 되어 드릴게요. 블루문이 뜬 특별한 밤이잖아요?


남자의 말에 혜인은 무대 뒤편의 블루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 블루문의 몸집이 더 커진 것 같았다. 알코올 기운 때문일까, 그녀는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다시 초점을 맞춰 천천히 무대 위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 앞을 거대한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달빛을 반사하며 새하얘진 벽이. 그녀의 오른손이 무엇인가를 꼭 쥐고 있었다. 그것은 며칠 전 구입한 커다란 붓이었다. 완성하지 못했던 서랍 속 그림이 혜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혜인은 팔을 뻗어 벽 위에 선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붓은 마치 넘실대는 파도를 탄 듯 부드럽게 흐르며 빈 공간을 채웠고, 붓 끝에서 나온 그림은 본디 이곳에 있었던 듯 자연스럽게 벽과 하나가 되어갔다. 그렇게 뻗어나간 선들은 고독한 나무에서 덩굴로, 그녀의 몸을 닮은 고운 곡선들로 변해가며 벽과 그녀 사이의 공간을 조금씩 삼켜들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혜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그리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자신이 속해있는 곳이 어디인지. 혜인은 그저 자신의 마음을 따라갈 뿐이었다. 그녀는 다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꿈도 환영도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몸과 마음에 아로새겨진 채 실재하고 있는 '그 무엇'이라는 것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