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오타루를 보며 나는 그녀를 생각한다.
새하얀 무채색의 결정들이 현란한 유채색의 빛깔을 압도하는 겨울의 오타루에서.
선천적으로 온도에 둔감한 나는 계절을 빛깔로 기억한다. 봄의 샛노란 개나리, 여름의 푸르른 바다, 가을의 단아한 선홍빛 잎사귀들, 겨울만이 품고 있는 깨끗한 무채색의 풍경… 이런 나에게 겨울은 눈과 동의어이다. 한 해의 시작과 끝인 겨울, 그녀와 나, 우리 인연의 처음과 마지막에 배경처럼 놓여 있던 겨울은. 그래서였을까? 그녀를 잊고 싶었음에도 이곳 오타루를 찾아와야겠다는 마음이 든 이유는. 그렇게 떠나온 이곳에서 속절없이 그녀를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일주일의 휴가를 받았다. 딱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오타루에 머물러보고 싶다는 생각 외에는. 온통 새하얀 이곳에 일주일쯤 몸을 담그고 나면 내 머리도 마음도 백지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홀로 비행기에 몸을 싣고 삿포로에 도착한 후, 눈길을 가르는 기차를 타고 이곳 오타루까지 왔다. 오타루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일본 건축 양식의 호텔에 짐을 풀고 뜨거운 온천에 몸을 내맡겼다. 어둠이 짙어진 후 방으로 돌아와 다다미에 누워 무심코 텔레비전을 틀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일본 텔레비전에서 처음 보는 일본 AV여배우가 숨이 넘어갈 듯한 탄성을 내뱉었다. 온천으로 달궈졌던 몸이 다시금 뜨거워졌고,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손이 아래로 향했다. 이곳에서의 첫날, 나는 깊은 밤 오래도록 스스로를 위로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무작정 걸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낯설고 하얀 세상을 음미하며 천천히 걷다 보면 과거를 떨쳐버리고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고 감지하지 못했던 것들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오타루에 머물렀던 일주일 동안 눈이 끊이지 않았다. 멈추지 않는 눈은 채 녹을 새 없이 땅 위로 소복이 덮였고, 거리곳곳에 키높이만큼의 눈둔덕들을 만들어냈다. 내게 낯설었던 점은, 이곳 사람들은 도로가 아니고서는 쌓여가는 눈을 모아둘 뿐 별로 치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거였다. 내 고향 사람들은 눈이 내리기가 무섭게 치워내느라 분주했건만.
오타루에서의 날들은 비슷한 모습으로 흘러갔다. 숙소에서 느지막이 일어난 나는 전날 편의점에서 사둔 음식으로 간단히 허기를 채우고 오후가 되어 오타루의 거리로 나섰다. 그러고는 시내 이곳저곳을 걷고 또 걸었다. 내리는 눈을 맞으며 사람들의 발자국이 닿지 않은 길을 가고 이국의 언어를 귀에 담으며 운하를 거닐었다. 그렇게 시내를 세 바퀴쯤 돌고 겨울의 해가 지평선 너머로 흐릿해질 때쯤 호텔로 돌아왔다. 인구 10만 남짓의 중소도시인 오타루의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데는 천천히 걸어도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걷던 길 위에서였다. 여자를 처음 마주하게 된 것은.
여자를 처음 본 곳은 눈이 내리던 오르골당 근처의 횡단보도 앞이었다. 여자는 도로를 건널 생각이 없는 듯 쪼그려 앉은 채 눈을 뭉치고 있었다. 여자의 양옆으로 높다랗게 쌓인 눈 무더기가 있었다. 처음엔 그저 조금 특이한 사람이려니 생각하고 지나쳐 갔다. 그런데 오르골당에서 꽤 오랜 시간을 있다 돌아서 나오는 길에도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무른 채였다. 허리를 아래로 굽힌 채 서 있는 여자의 손 끝에서 커다란 눈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내리던 눈과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창백한 피부에 연분홍빛으로 솟아올라와 있는 광대가 마치 눈밭에 피어있는 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는 장갑을 끼고 있었음에도 손이 시려오는지 중간중간 장갑에서 빼낸 손을 모아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여자와 나의 시선이 만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와 나는 그저 머나먼 타인일 뿐이었다. 내가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건네기 전까지는.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던 여자와 내가 '기억'으로 남게 된 건 우리가 나눈 대화 때문이리라. 그것은 여자와 내가 세 번째 마주치던 순간에 시작되었다. 여자를 세 번째 만난 날은 내가 오타루에 머물기 시작하고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슬슬 여행의 일상에서 비껴 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 그때.
그날도 여자는 건널목 앞에 서서 쌓인 눈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어쩐지 여자에게 묻고 싶어졌다. 무엇을 만들고 있는 건지. 어디에서 난 용기인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나는 성큼성큼 여자에게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내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일본어를 성실히 끌어내, 더듬더듬.
- 당신은 무엇을 만들고 있나요?
여자가 나를 물빛 어린 눈으로 올려다봤다. 내 허술한 말투 때문인지 피식, 미소를 지으며.
- 눈사람이요. 다시 만들어야 하거든요. 어제 만들었던 눈사람이 사라져 버렸어요. 누군가가 밤새 데리고 간 것이 분명해요.
다행히 말을 하는 것보다 알아듣는 것은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특히 '눈사람을 데리고 갔다'라는 부분에서. 내 듣기 능력에 문제가 있거나 여자의 머리에 문제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순간 눈앞의 여자가 이상하다는 생각보다는 꽤 미인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내가 아무 말 없이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자 여자가 말을 이었다.
- 물어봐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처음이에요. 내게 이런 질문하는 사람은….
일본인들은 타인의 행동에 관심을 별로 기울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그 무관심의 자세가 본심인 건지 본심을 거스르는, '예의'라고 간주될 만한 꾸며진 태도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혹여 내 물음이 무례한 관심이 되지 않길 바라며 찬찬히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여자의 얼굴이 밝아보였다.
- 눈사람을 계속 만드는 이유가 뭔가요?
눈코입이 없는 눈사람을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 외로워 보여서요.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사람들이요.
여자는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조금 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 다른 길로 건너가려는 사람들은 외롭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친구가 필요해요. 난 그 친구를 만들어주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거랍니다.
- 의미 있는 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의 말을 되풀이하자 여자는 몸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 쉿! 이건 비밀인데요, 당신한테만 얘기해 주는 거예요. 내게 질문을 했으니까요.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몰라요. 이상하다고만 생각할 뿐이죠. 하지만 언젠가 그들 자신도 모르게 알게 될 거예요.
여자는 마치 피카소의 추상화를 설명하듯 이해하기 힘든 말을 계속했다. '이상하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범주에 나도 포함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며 친절한 대답에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홀로 걷는 길, 어쩐지 여자가 했던 몇 마디 말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외로움, 길을 건너는 사람들, 의미 있는 일, 같은 것들이. 그와 함께 눈코입 하나 없이 적막하게 서 있을 눈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부터였다. 도시의 풍경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 것이. 길가에 떨어져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에 보이는 잔가지들을 하나둘씩 주머니에 담았다. 마치 겨울 다람쥐들이 양볼 가득 도토리를 채워 물듯이. 그렇게 잔가지들을 찾으며 길을 걷다 보면 때때로 눈코입이 없는, 여자가 만들었을지도 모를 건널목 앞의 눈사람들과 마주쳤다. 우연히 맞닥뜨린 눈사람들이 반가웠고 도시의 어느 건널목 앞에 서 있을 여자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눈사람에 어울릴만한 잔가지를 골라 눈사람의 얼굴 위로 슬쩍 올려놓았다. 처음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스쳐 지나가듯 무심하게. 그러고도 마치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듯 시침을 떼고 가던 길을 갔지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제법 정성과 시간을 들여 눈코입을 완성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손을 움직이고 구체적인 행위를 하며 나 자신이 점점 앞으로, 더 나은 곳으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기분이었다. 나는 더 오랜 시간 걷고 더 많은 가지들을 모았다.
다음 날, 여자와 다시 마주쳤다. 길 건너에서 눈사람의 얼굴을 만들던 여자와 눈사람의 얼굴에 눈코입을 붙이고 있던 내가.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던 오후 무렵이었다. 나를 발견한 여자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여자에게 다가가 가방 속에 넣어둔 시내 지도를 꺼내 쑥스럽게 건넸다. 지도 곳곳에 볼펜으로 체크 표시를 해 둔 채로.
- 이곳에, 눈사람이 필요해 보여요.
나는 손으로 지도 여기저기를 천천히 짚어 보였다. 여자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 이름이, 뭐예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미도리.
초록을 뜻하는 ‘미도리’라고 말하는 여자의 입에서 따스해 보이는 하얀 입김이 조금씩 스며 나왔다.
- 당신은 오타루에 온 이유가 있나요?
여자의 목소리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내 착각이었을까, 여자는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 잊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되네요.
- 그래서 당신은 괴로운가요?
투명한 눈빛으로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여자의 표정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당신을 괴롭히지 않는 기억을 줄게요. 오타루의 미도리를 생각해요.
미도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타루의 겨울바람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내리던 눈이 점점 굵어지더니 사선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 우리, 함께 눈사람 만들어요!
미도리가 뭉쳐진 자그마한 눈덩이 하나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마치 소중한 선물이라도 되는 양 두 손을 펼쳐 조심스럽게 눈덩이를 받아 들었다. 신기하게도 손이 시려왔다. 그런데 시린 끝에 낯선 온기가 느껴졌다. 겨울숲 저너머에 비치는 여름의 태양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날리던 눈은 이내 작은 눈보라가 되어 겨울 오타루의 대기를 그림처럼 채웠다. 송이송이 외로이 흩날리던 눈이 빗줄기처럼 모여 하나가 되어갔다.
내리는 '눈비'속에서도 미도리와 나는 우리들만의 의미 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던 그때, 괴로운 기억과 즐거운 현재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균형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서로의 기억을 포개어갔다.
오타루에서의 마지막 날, 미도리는 보이지 않았다. 거리를 걸으며 건널목의 눈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문득 그녀를 떠올렸다. 인연의 시작과 끝을 겨울과 함께 나눈 또 다른 그녀를.
오타루를 떠나며, 차창 밖 새하얀 풍경을 마음속에 담으며 미소 지은 채 ‘안녕'을 되뇌었다. 첫인사이자 마지막 인사이기도 한 안녕을.
풍경 너머 어딘가에 서 있을 그녀가 맑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