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그때의 흐뭇했던 마음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렇게 연습한 이름은 내 손끝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물건에 새겨졌다. 스케치북 한 장 한 장마다, 내 인생 첫 책상 위에, 심지어 내가 아껴 입던 원피스에 달려있던 택(tag) 가운데에도.
나의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건 나 자신의 역사에서 흡사 '문명의 발생'과도 같았고, 나는 가능한 그 거대한 역사적 흔적을 내가 닿을 수 있는 많은 곳들에 남기고 싶었다.
내가 이 기억을 떠올리게 된 건 졸업한 모교에서 온 문자 한 통 때문이었다.
감사하게도 학교는 잊을만하면 졸업한 지 십수 년도 더 된, 전설로 치부될 법한 학번인 나를 잊지 않고 학교 소식을 전해온다. 그러나 현생의 삶을 살기에 급급한 나는 보통 학교에서 보내온 문자들을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날아든 문자 한 통이 내 시선을 붙들었다. 학교 건물의 리모델링을 위해 일정 금액이상을 기부하면 그 건물 벽돌에 내 이름을 새겨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문구를 본 순간, 어린 시절 내 손으로 직접 이름을 새겨 넣던 그때 그 마음이 되살아났고, (내게 있어선) 적지 않은 금액을 기꺼이 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난 후 한동안 그 사실을 잊고 지냈다.
그러다 최근에 리모델링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겨울이 소리 없이 물러나간 자리에 봄기운이 넘실대던 날이었다. 나는 짝꿍과 함께 우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봄의 캠퍼스로 향했다.
몇 년 만에 간 학교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 우리의 청춘이 녹아들어 있는 그곳에 따스한 봄햇살과 어우러진 새로운 청춘들의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아직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한 빛바랜 잔디밭은 청춘의 에너지로 푸르디푸르렀다. 순간 내가 다시 20대 초반의 대학생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대책 없이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우리 얼른 이곳을 벗어나야겠다. 웬 아줌마 아저씨냐고 쳐다보는 것 같은데?"
눈치 없는 짝꿍이 던진 한 마디에 나풀나풀 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내 마음이 삽시간에 땅 위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낭만이라고는 없다'라고 잔뜩 핀잔을 주고 싶었지만 사뭇 보드라워져 있는 마음에 입 밖으로 나오는 말도 밝고 친절하게 걸러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캠퍼스를 조금 더 거닐다 리모델링이 되었다는 건물로 이동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곳은 학생증을 들이밀어야 입구를 통과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에게 학생증 같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입구에 있는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해야만 했다.
직원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가까이에서 보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생인 것 같았다. 어쩐지 흐뭇한 마음이 된 나는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왜 꼭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온 마음을 다해 성심성의껏 설명했다.
"이쪽으로 그냥 들어가시면 돼요!"
학생(혹은 대후배가)이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얘기했다.
그렇게 들어선 공간에서, 사람들의 활기로 분주한 그곳에서 나와 짝꿍의 이름을 마주했다.
은은한 금빛이 배경처럼 서있던 한쪽 벽면의 무수한 이름들 사이에서 우리의 이름을 발견한 그 순간, 심봉사가 눈을 뜨듯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사이좋게 나란히 기대어 있던 짝꿍과 나의 이름이 보란 듯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의 존재가 세상에서 사라진 후에도 이 건물이 스러지거나 폭파되지 않는 한 그곳에 살아남아, 이 세상과 함께 호흡해 갈 녀석들이. 봄날은 눈부셨고 사람들이 내뿜는 활기는 싱그러웠으며 우리의 마음은 아낌없이 즐거웠다.
이게 아니었을까? 내가 '그 문자'에 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름을 남기고 싶은 내 마음이 끝내 향하고 있는 곳은.
어쩌면 내가 계속 글을 쓰고 싶은 이유도, 궁극엔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을 이 세상에 남기고 싶은 욕망도, 이렇게 세상 위에 미약하나마 그래도 나름의 의미 있는 삶을 살다 간 한 사람이 있었노라고, 나의 흔적을 멋스럽게 보태고 싶어서이지 않을까.
묘비명으로만, 아니, 납골당 한구석 차가운 유골함 위에만 내 이름을 새기고 싶지 않은 내 절절한 몸부림 때문이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가는 중에 짝꿍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짝꿍은 마치 강력 접착제로 벽면에 시선이 붙어버린 듯한 자세로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처음 내 기부 소식을 전했을 땐 분명히, "왜 그런, 별 쓸모없는 짓을 했어?"라며 타박하던 그였는데… 나보다 그의 표정이 곱절은 더 밝아 보였던 건 오로지 그 순간의 내 기분 탓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