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자세히 보아야 어여쁜 공간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도 사물도 자세히 보아야 제대로 그 어여쁨을 알 수 있다.
우리 주변의 공간도 마찬가지다.
일상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평범한 도시의 회색빛 공간들에도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이러한 공간들에 우리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내어줄 때야 비로소 그들은 비밀스럽게 품고 있던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허심탄회하게 들려준다. 이러한 상호작용의 시간 이후로 그곳은 더 이상 예전의 평범한 공간이 아닌, 애정이 가는 특별한 곳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서울, 그중에서도 영등포는 이제껏 내게 삭막하고 어두운 이미지를 지닌,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서울의 구도심이었다. 대형 쇼핑몰인 '타임스퀘어'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보고 싶고 들르고 싶지 않은 곳. 시곗바늘을 몇십 년 전으로 돌린 것처럼 스러져가는 낡고 오래된 건물들과 집창촌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곳.
그래서였을까, 한 시민단체에서 영등포 주변을 돌며 일제강점기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를 함께 고찰해본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오히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재감 없이 느껴지던 이곳에 2시간을 넘게 걸으며 돌아볼 만큼의 역사적 이야기들이 깃들어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암울한 소식들만 들려오는 지금의 현실에서 살짝 비껴 나 답답한 일상과 그 일상의 공간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고 싶은 욕구가 일었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에 심어졌다는 플라타너스 잎들이 붉은 카펫처럼 소복이 깔린 늦가을의 길을 걸으며 영등포와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첫 방문지는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의 진원지인 문래공원이었다. 당시 이곳의 지하벙커에서 쿠데타의 작전회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 쿠데타 세력은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를 건너 정부를 장악하고 30년 군부독재를 시작했다.
문래공원에는 박정희의 흉상과 함께 지하벙커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근처 주민들이 평화롭게 휴일을 즐기며 발 딛고 있는 곳 바로 아래 어두운 역사의 자취가 고스란히 살아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그때 그 시절 시민들이 사력을 다해 어둠을 몰아내 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의 빛을 보며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일었다.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어른으로서 내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영등포는 예부터 땅이 질어 벼농사가 아닌 채소 농사가 이루어졌고 말이나 소를 키웠던 땅이었다. 그러나 경인선과 경부선이 통과하면서 중요한 공간이 되었고, 1930년대부터 방직공장과 맥주공장이 들어서고 공업화가 시작되면서 일제 강점기 한강 이남에서는 유일하게 시가지화 된 지역으로 전차가 다녔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문래 예술촌과 그 일대를 둘러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의 문래 예술촌이 있는 자리는 일제 강점기 공업화와 함께 공장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던 자리였다. 영세한 공장들에서 퍼져 나오는 특유의 기름 냄새 가득한 좁은 골목을 걷다 보면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핫 플레이스로 가득한 문래 예술촌이 모습을 드러낸다. 근처에는 삼백(밀가루, 설탕, 방직) 산업의 대표 주자였던 대선 제분 건물이 전시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중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갈 뻔했던 오래되고 낡은 이곳이 21세기 젊은이들의 ‘힙한’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며 스러지지 않는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자그마한 공간 곳곳에서 느껴지는 민초들의 삶에 대한 의지와 자생적 힘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화려한 가게들이 즐비한 영등포 '타임 스퀘어' 뒤편에는 내가 그동안 알지 못하고 있던 역사적 현장이 숨어(?) 있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분위기 있는 카페로 변신한 '경성방직 사무동'이 그곳이다.
김성수가 창립한 경성방직은 일제 강점기 토착 자본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김성수는 경성방직 외에도 삼양사, 동아일보,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사업 영역을 확장시키며 기득권을 공고히 하였고 우리나라 재벌의 원형을 만들어낸 장본인으로서 큰 역할을 했다.
한 집안이 지속적으로 거대 기업을 이끌어가는 소위 '재벌'은 해외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어 영어사전에도 우리나라 발음 그대로 'chaebol'이라는 표기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실로 웃픈 일이다.
두 시간이 넘게 걷다 보니 늦가을의 해는 마지막 옅은 빛을 산란시키며 산 아래로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지는 해를 등에 지고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영등포 공원 내에 위치한 오비맥주 공장터였다.
1933년부터 공장이 이전한 1996년까지 맥주 제조용으로 사용한 '담금솥'이 거대한 랜드마크로 공원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었다.
빛바랜 낙엽들로 가득한 넓은 공원에 홀로 덩그러니 놓여, 오랜 세월에도 녹슬지 않고 석양 아래 여전히 금빛을 발하고 있는 솥의 모습이 어쩐지 기괴해 보였다. 그 모습이 흡사 정치권을 위시해 우리 사회 곳곳 깊숙이 침투해 오래도록 ‘검은 힘’을 발휘하고 있는 일제의 잔재를 상징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여운을 남겼다.
이 시간 이후로 영등포는 내게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영등포가 아닐 것이다.
영등포는 이제껏 내가 몰랐던 슬픔, 아픔과 고난의 역사를 오롯이 품고 있는 곳이었다. 목소리 높여 외치지 않지만 안으로 고통을 삭이며 서민들과 함께 살아나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며 느리지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곳.
단지 내가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 방문을 계기로 무심히 스쳐 지나가던 것들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제야 세상은 비로소 깊이 품고 있는 모습들을 드러내며 좀 더 친근하고 허심 탄회하게 내게 다가올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