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기억하는 나만의 방식
나는 계절의 변화를 해의 길이나 빛깔로 가장 먼저 느낀다.
눈 뜬 아침 창밖으로 비치는 하늘빛, 퇴근 무렵 구름에 걸쳐져 있는 빛의 산란 정도, 빛의 꼬리가 사라질 무렵 바라본 시곗바늘의 위치 등을 보며 지금 내가 한 해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 짐작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해가 긴 여름보다는 밤이 긴 겨울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제목도-노래 자체가 가장 좋다는 것은 아니다-코나의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이며, 소설도 '밝은 밤', '7년의 밤'처럼 '밤'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작품을 좋아한다.
'밤'은 어두움을 상징하는 단어이지만 왠지 난 그 한 글자에서 어두움보다 훨씬 더 거대한 따스함과 편안함과 낭만을 느낀다.
내가 낮보다 밤을 더 좋아하는 이유를 들어보자면 몇십 가지 정도는 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중 대략 열 가지만 꼽자면,
- 낮은 내게 '각성'을, 밤은 내게 '편안함'을 준다
- 낮동안엔 쓰고 싶지 않은 가면을 써야 하지만 밤에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 햇빛 아래에서 노는 것보다 달빛 아래에서 노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
- 같은 풍경이라도 밤에 보면 열 배쯤 더 아름다워 보인다
- 해는 내게 '빨리 달릴 것'을 요구하고, 달은 내게 좀 더 '천천히 가도 좋다'라고 말해준다.
- 밤은 분위기 있는 재즈 음악을 더 분위기 있게 만들어준다
- 밤에는 민낯으로 외출해도 더 당당한 내가 된다
- 갖가지 예쁜 조명들이 불을 밝힌다
- 밤이 되면 감성지수가 마구 올라간다
- 술기운에 달아 오른 내 낯빛을 햇빛은 잘 드러내고 달빛은 잘 감싸준다...
이런 나이기에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절기 1위는 '추분'이다.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아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이 왜 좋은 거냐고 묻는다면, 여행을 앞둔 여행자의 마음이나, 30명으로 이루어진 학급에서 성적이 조금씩 조금씩 오르고 있는 현재 15등 학생과 비슷한 마음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의 길이가 가장 길었던 하지를 지나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이 되면, 나는 마치 기분 좋은 일의 시작점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앞으로 한동안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예감하고 있는 사람이, 그 좋은 일을 눈앞에 두고 서 있는 여행자가 된 기분. 돌아올 일이, 내려갈 일만 남은 사람이 아닌 앞으로 나아갈 길을, 고개 너머 예쁜 동산이 펼쳐져 있는 길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그래서 가을이 되면, 코끝으로 가을 향기가 느껴지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건가 보다.
이때쯤이면 난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을 들으며 길을 걷다 때때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이런 가을의 시작을 난 '입추'가 아닌, 낮과 밤의 길이가 공평해지는 '추분'으로 실감한다.
해서, 내겐 추분이 무척 의미 있게 느껴진다. 인생 2막의 시작을 가을에 비유하기도 하듯 한 해의 2막도 추분이 그 출발점일 테니.
이제부터는 낮이 그 자리를 밤에게 조금씩 더 내어주며 다가올 겨울을 찬찬히 준비해 나갈 것이다. 나도 오늘을 그냥 스쳐지나 보내지 않고 잠시 머무르며 함께 추억을 만들고 싶다..
2022년의 추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전 무언가 기억에 남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나만의 소소한 이벤트를 만들고 그 이벤트를 더 값진 추억으로 새기기 위해 오늘도 짝꿍과 함께 길을 나섰다.
거짓말처럼 선선해진 밤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방랑자가 된 듯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무지갯빛 분수대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광화문 광장, 4차원의 세계로 안내하는 듯 우뚝 서 있는 광화문, 가을밤의 추억을 나누고 있는 연인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덕수궁 돌담길, 늘 그 자태로 서 있을 것 같은 아늑한 성당 앞을 지나 뜻밖에 마주친 축제 속 정동 거리,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따스한 불빛으로 우리를 맞아준 목적지까지...
단지 걸었을 뿐이었는데 세상은 내게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그로 인한 행복감을 선물해주었다.
상쾌하고 달콤한 공기, 은은한 달빛, 아름다운 풍경, 대화가 잘 통하는 짝꿍과 함께하는 밤 산책의 순간만큼 완벽한 시간이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던 추분의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풍경 하나하나를 마음속 깊숙이 접어 넣으며 홀로 되뇌어본다.
앞으로 내 인생에 몇 번의 추분이 더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2022년 오늘도 행복하게 잘 보내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