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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Sep 24. 2022

어여쁜 추분이 돌아왔다

오늘을 기억하는 나만의 방식

나는 계절의 변화를 해의 길이나 빛깔로 가장 먼저 느낀다.

눈 뜬 아침 창밖으로 비치는 하늘빛, 퇴근 무렵 구름에 걸쳐져 있는 빛의 산란 정도, 빛의 꼬리가 사라질 무렵 바라본 시곗바늘의 위치 등을 보며 지금 내가 한 해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 짐작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해가 긴 여름보다는 밤이 긴 겨울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제목도-노래 자체가 가장 좋다는 것은 아니다-코나의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이며, 소설도 '밝은 밤', '7년의 밤'처럼 '밤'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작품을 좋아한다.

'밤'은 어두움을 상징하는 단어이지만 왠지 난 그 한 글자에서 어두움보다 훨씬 더 거대한 따스함과 편안함과 낭만을 느낀다.


내가 낮보다 밤을 더 좋아하는 이유를 들어보자면 몇십 가지 정도는 댈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중 대략 열 가지만 꼽자면,

- 낮은 내게 '각성'을, 밤은 내게 '편안함'을 준다

- 낮동안엔 쓰고 싶지 않은 가면을 써야 하지만 밤에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

- 햇빛 아래에서 노는 것보다 달빛 아래에서 노는 게 훨씬 더 재미있다

- 같은 풍경이라도 밤에 보면 열 배쯤 더 아름다워 보인다

- 해는 내게 '빨리 달릴 것'을 요구하고, 달은 내게 좀 더 '천천히 가도 좋다'라고 말해준다.

- 밤은 분위기 있는 재즈 음악을 더 분위기 있게 만들어준다

- 밤에는 민낯으로 외출해도 더 당당한 내가 된다

- 갖가지 예쁜 조명들이 불을 밝힌다

- 밤이 되면 감성지수가 마구 올라간다

- 술기운에 달아 오른 내 낯빛을 햇빛은 잘 드러내고 달빛은 잘 감싸준다...


이런 나이기에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절기 1위는 '추분'이다.

밤이 가장 긴 '동지'가 아닌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이 왜 좋은 거냐고 묻는다면, 여행을 앞둔 여행자의 마음이나, 30명으로 이루어진 학급에서 성적이 조금씩 조금씩 오르고 있는 현재 15등 학생과 비슷한 마음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의 길이가 가장 길었던 하지를 지나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추분이 되면, 나는 마치 기분 좋은 일의 시작점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앞으로 한동안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예감하고 있는 사람이, 그 좋은 일을 눈앞에 두고 서 있는 여행자가 된 기분. 돌아올 일이, 내려갈 일만 남은 사람이 아닌 앞으로 나아갈 길을, 고개 너머 예쁜 동산이 펼쳐져 있는 길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그래서 가을이 되면, 코끝으로 가을 향기가 느껴지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건가 보다.

이때쯤이면 난 이문세의 '가을이 오면'을 들으며 길을 걷다 때때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이런 가을의 시작을 난 '입추'가 아닌, 낮과 밤의 길이가 공평해지는 '추분'으로 실감한다.

해서, 내겐 추분이 무척 의미 있게 느껴진다. 인생 2막의 시작을 가을에 비유하기도 하듯 한 해의 2막도 추분이 그 출발점일 테니.

이제부터는 낮이 그 자리를 밤에게 조금씩 더 내어주며 다가올 겨울을 찬찬히 준비해 나갈 것이다. 나도 오늘을 그냥 스쳐지나 보내지 않고 잠시 머무르며 함께 추억을 만들고 싶다..




2022년의 추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전 무언가 기억에 남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나만의 소소한 이벤트를 만들고 그 이벤트를 더 값진 추억으로 새기기 위해 오늘도 짝꿍과 함께 길을 나섰다.

거짓말처럼 선선해진 밤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방랑자가 된 듯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무지갯빛 분수대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광화문 광장, 4차원의 세계로 안내하는 듯 우뚝 서 있는 광화문, 가을밤의 추억을 나누고 있는 연인들을 포근하게 감싸 안고 있는 덕수궁 돌담길, 늘 그 자태로 서 있을 것 같은 아늑한 성당 앞을 지나 뜻밖에 마주친 축제 속 정동 거리,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따스한 불빛으로 우리를 맞아준 목적지까지...

2022년 추분의 밤 풍경들(광화문 일대와 '정동야행' 축제 현장, 그리고 촛불로 가득했던 우리의 목적지)

단지 걸었을 뿐이었는데 세상은 내게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그로 인한 행복감을 선물해주었다.

상쾌하고 달콤한 공기, 은은한 달빛, 아름다운 풍경, 대화가 잘 통하는 짝꿍과 함께하는 밤 산책의 순간만큼 완벽한 시간이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던 추분의 밤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풍경 하나하나를 마음속 깊숙이 접어 넣으며 홀로 되뇌어본다.

앞으로 내 인생에 몇 번의 추분이 더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2022년 오늘도 행복하게 잘 보내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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