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할 수 없다면 품자!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청각장애 진단을 받았을 때, 내 가슴은 무너졌다. 하지만 솔직히 그때는 현실감이 없었다. 아이는 아직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나이가 아니었고, 옆집 또래 아이들도 말을 시작하지 않았기에 청각장애가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남편은 회사에 가고, 첫째는 유치원에 가있는 동안 나는 아이에게 소리를 들려주느라 애썼다. 언어치료사님께서는 "아이에게 소리를 듣는 것이 즐겁고 신나는 일임을 알려주세요."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도윤이 뒤에서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며, 도윤이가 뒤를 돌아볼 때마다 "잘했어."라고 말하며 그의 손에 좋아하는 인형을 쥐어주곤 했다. 그런 순간들 속에서 "장애"라는 단어는 우리와 멀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이의 장애를 실감하게 된 것은 그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면서였다. 4살 때 시작한 어린이집에서 도윤이는 유일하게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내가 지금껏 들려주었던 모든 소리들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마음속으로 '이것이 난청의 한계인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도윤이와 청각장애 사이에 거리를 두려 했다. '도대체 언제 말을 시작할까?' 5살이 되어 또래 아이들이 문장을 유창하게 구사할 때에도, 도윤이는 단 한 문장도 온전히 말하지 못했다. '안 되나 봐. 난청은 안 되는 건가 봐.'라는 생각이 들었고, 남편에게 하소연하며 눈물을 쏟았다. 매일매일 장애의 한계를 느끼면서, '장애를 극복하자'는 다짐이 점점 희미해지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5살 무렵, 나는 청각장애 이해 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각장애"라는 단어는 여전히 나에게 금기어였다. 강사로 활동한 지 1, 2년이 지나도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이 어려웠다. 그것은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몇 년 차 강사가 되면서, 일반 학급에서 잘 지내는 난청 아이들을 보며 나의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아이들을 보면서 희망이 생겼던 것 같다.
6살이 되자 도윤이는 "엄마, 유치원에서 왜 나만 인공와우를 했어?"라고 물었다. 나는 "아빠는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쓰잖아. 도윤이는 귀가 잘 안 들려서 와우를 착용하는 거야."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언제 도윤이에게 청각장애를 알려주어야 할까?'라는 고민에 빠졌다. 전문가의 조언을 구했더니, 7살 즈음에는 청각장애와 수술, 재활 과정을 객관적으로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어느 날 밤, 도윤이에게 청각장애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아이는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부모가 먼저 장애를 품어야 한다. 나 역시 그렇게 되었다.
이제 나는 깨달았다. "장애"라는 단어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도망가고 숨고 싶을지라도, 장애는 우리 아이를 정의하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이 세상에서 언젠가는 수없이 들어야 할 그 단어를 내가 부정한다고 해서 아이의 현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장애라는 특징이 약점이 아닌 강점이 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주어진 것이라면 그 안에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니, 우리는 그 이유를 찾아내고, 그 특징을 더 빛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오늘도 도윤이와 함께 새로운 소리를 찾아 나선다. 어제보다 조금 더 또렷하게 말하려 노력하는 도윤이를 보며, 나는 그가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다시한번 다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도윤이의 눈빛 속에 담긴 빛을 보며 나는 확신한다. 이 아이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것이고, 나는 아이 곁에서 그의 목소리를 응원할 것이다.
세상은 아직도 장애를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지만, 우리는 조금씩 그 벽을 허물어가고 있다. 난청아이들의 이야기가 그 변화의 시작이 되기를, 우리 모두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언젠가 도윤이가 자신의 목소리로 세상과 소통하며, "장애"라는 단어가 더 이상 장벽이 아닌 다리 역할을 하게 될 날을 꿈꾸며, 나는 오늘도 아이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