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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북스 Sep 27. 2024

전쟁터의 전우들

매일을 살아가는 버팀목

올해 6월, "아이소리 앙상블" 멤버 13 가족과 함께 캠프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청각장애 아이들과 함께했던 합창단 멤버들, 이제는 가족 같은 사이가 된 우리는 수영장이 있는 커다란 펜션을 빌렸다. 출발할 때부터 기분이 어찌나 편한지, '내 아이가 못 들으면 어쩌지?' '부르는데 대답 못하면 어쩌지?' 같은 평소의 불안은 어디로 가고, 마음속이 시원하게 뚫린 느낌이었다.


하나둘씩 도착한 아이들이 수영 준비를 시작하는데, 어느새 모두 방수 인공와우로 갈아 끼우기 시작했다. (교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림). 평소 같았으면 비장애인 친구들은 이미 수영복을 갈아입고 빨리 들어가자며 발을 동동 구르고,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서두르기 바빴을 텐데, 그날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기서는 모두가 같은 기기를 쓰고, 같은 절차를 밟아 수영장에 들어가니, 다들 여유 있게 하나씩 와우를 갈아 끼우고 있었다. 그 느긋한 모습들이 어찌나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껴지던지... 그 캠프에서 처음으로 이런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위로와 안도감을 주고 있다는 걸. 그날은 마음속의 불안조차 휴가를 떠난 날이었다.


처음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2015년, 그때도 인스타그램이 존재하긴 했지만 청각장애 관련 피드를 찾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인터넷 검색창을 20페이지 넘게 뒤져도 난청에 대해 제대로 된 정보는커녕, 공감할 만한 사진 한 장 없어서 답답함에 속을 끓이던 날들이었다. 그런데 몇 년 사이, 난청, 인공와우, 청각장애가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을 타고 급부상했다. 이제는 스크롤만 내리면 관련 피드가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한두 명씩 sns에서 내 아이의 장애를 커밍아웃하는 부모들이 생기고, 어느새 ‘장애’를 드러내는 것이 창피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되려 비슷한 상황의 아이들을 키우며 우리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서로의 아이를 응원하게 되었다. 아이의 청각장애로 맺어진 보이지 않는 전선은 장애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결속력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끔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현타’가 불쑥 치고 올라오는 순간들이 있다.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장애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왔을 때가 바로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 아무리 강해지려 해도,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마음이 무너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괜찮다고 했지만, 나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 감정을 어디에 풀어낼 곳이 없어서, 결국 인스타에 하소연하듯 글을 올렸다. "오늘, 아이가 친구들에게 ‘장애인’이라고 놀림을 받고 왔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라며 내 무거운 마음을 쏟아냈다.


평소에는 고요하던 피드가 갑자기 생기 넘치기 시작했다. 내 이야기를 본 전우들이 댓글로 달려와 응원의 말을 보내왔다. "힘내세요. 그런 못된 녀석"이라며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겠는가? 몇몇 전우들은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으며, "우리 아이도 그랬어요. 그때는 마음이 무거웠는데, 지금은 친구들과 더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말로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가창시험을 앞둔 아이가 노래 연습을 하는 모습을 '가창시험 음치로 잘 보고 왔다'라고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소리를 듣는 게 익숙하지 않은 아이에게 노래 시험이라니,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전우들이 그 연습 영상을 보자마자 여기저기서 칭찬과 격려를 아낌없이 보내왔다. “와! 진짜 멋지다! 우와 노래 잘한다” “끝까지 해낸 것만 해도 너무 멋져요.”  이 보이지 않는 전선을 통해 날아온 온갖 격려와 응원이, 마치 에너지를 충전하듯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가족들도 잘 알지 못하는, 같은 길을 걸어가는 전우들이 보내준 이 응원이야말로 나에게는 진짜 위로였다.


가끔 인스타 DM으로 아이의 언어 재활이나 학교 생활에 대해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신다. 나는 그런 DM을 받을 때마다 어찌나 반가운지 모른다. 그 질문 속에는 걱정과 희망이 함께 담겨 있는 것을 알기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그분들께 전해드리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작년에 아이의 발음 문제로 고민하시던 ㅇㅇ 어머니와 DM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그분은 걱정이 깊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대화를 통해 큰 공감과 위로를 받았다. 언젠가 꼭 만나서 차 한 잔 하자는 약속을 하고, 우리는 몇 번이고 소통을 이어갔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반갑던지!


얼마 후 그 어머니를 직접 만나 차를 마셨다. 청각장애 아이를 키우는 것도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쉬운 인연이 아닌데, 이렇게 쌍콤보 인연을 만나다니! 얼굴을 처음 마주한 그 순간,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아이의 성장 과정, 서로 겪었던 어려움과 기쁨을 나누며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따뜻함이 번지는 것을 느꼈다. 이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과 눈을 마주하고 웃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를 깨달았다.


청각장애 아이의 엄마를 만나면 우리는 서로 아이의 청각보조기기를 먼저 묻는다. 어떤 보조 기기인지 그걸 착용하고는 데시벨이 어느 정도 되는지.. 비장애인 엄마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반 전문가 다운 대화가 시작된다. 장애를 어떻게 언제 발견했고, 재활은 어떤 과정으로 진행했는지 서사가 장엄하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우리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처럼 서로의 지나온 날들을 대견함으로 응원한다. 


이런 반 전문가들의 대화가 끝나면 우리의 대화는 여느 엄마들과 똑같이 사교육 이야기로 이어진다. 장애 아이를 키우고 있어도 열렬하게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고 있으니 지갑에서 나오는 돈의 양은 비장애아이 가정집과 비등하다. 장애인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어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다른 집들과 비슷한 고민들을 하고 있다. 뭐 특별할 것이 있을 것 같지만 울고 웃는 일은 옆집이나 뒷집이나 장애아이 키우는 집이나 비슷하지 않을까? 함께 걸어 나오며 우리는 다음에 또 만날 것을 기약했다. 아이들이 다른 학교를 다니고 각자의 교육으로 아이를 키워 갈 테지만 이렇게 가까이 사는 동지가 생겨 어깨가 든든하다. 


하지만, 요즘 문득문득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DM으로 만난 엄마들이나, 난청 아이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집에서 아이와 단둘 이만 지내시는 어머님들, 그분들은 잘 지내고 계실까? 혹시 아직 아이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마음의 그늘 속에서 혼자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계시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분들이 밖으로 나와 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따뜻한 격려를 받으신다면, 아이의 장애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고, 더 당당해지실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분들에게 어떤 다리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나누는 그 시간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그분들도 함께 하시면 분명 느끼실 수 있을 텐데.


서로 매일 얼굴을 보고 수다를 떠는 사이는 아니지만, 우리의 결속력은 그 어떤 것에도 뒤지지 않는다. 우리는 인스타를 통해 서로의 아이들을 응원하고, 새 학기가 되면 서로에게 정보를 나누는 보이지 않는 든든한 동지가 된다. 가족들도 모르는 미묘한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그 복잡한 감정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나누며 살아간다. 그 연결고리는 말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큰 버팀목이다.


오늘도 우리는 인스타에서 아이의 재활 모습을 보며 '좋아요'를 누르고, 수술을 받은 아이의 사진에는 "예쁜 소리만 듣자"라는 댓글을 남긴다. 그러면서 서로의 아이가 겪었던 일, 혹은 앞으로 겪게 될 일을 두 손 모아 진심으로 응원한다. 우리는 화면 너머로 교감을 나누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아이가 처음으로 소리를 들은 그 기적 같은 날을 기뻐하고, 또 누군가는 재활의 고단한 여정을 응원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성장을 축하하고, 어려움을 격려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함께 걸어간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우리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료들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힘을 내고 있는 이들이 있기에,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걸 매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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