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에게 '선한'환경이다.
청각장애 이해 교육 강사로 일하면서, 내 아이가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때때로 큰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난청 아이들(보청기나 인공와우를 사용하는 아이들)이 있는 학급에 강의를 가기 전, 담임선생님과 난청 아이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내가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우리 아이도 그랬어요"라는 말이 단순한 격려를 넘어 실제로 도움이 되는 해결책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특히, 내 아이가 학교에서 겪는 난청인으로서의 어려움은 강의 내용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직접 체감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맞춤형 교육이 된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참 뿌듯하다.
작년과 올해는 특히 초등 고학년 학급에서 청각장애 이해 교육을 할 기회가 많았다. 그때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참 적극적이었는데, 고학년이 되더니 와우도 자꾸 숨기고, 소극적으로 변했어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둘째 아이 생각이 많이 났다. 지금은 와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신의 정체성도 잘 인지하고 있지만, 고학년이 되면 아이도 그렇게 변할지 걱정이 되었다. '왜 그럴까? 사춘기 때문일까? 아이들이 왜 소극적으로 변할까?' 이런 질문들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원인을 조금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잘 안 들리는 상황에 대해 물어보던 중, "00아, 학교에서 안 들리면 친구들에게 다시 물어보지? 그럼 친구들은 다시 이야기해 줘?"라고 물었더니, 아이가 "응, 이야기해 주긴 하는데... 친절하지는 않아."라고 답했다. 그 대답에서 아이가 매일 아주 작은 불친절함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건 친구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학교는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고, 아이들 간의 소통도 빠르게 이루어진다. 누군가 계속해서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줘", "나 못 들었어"라고 물어본다면, 처음에는 친절하게 대답하던 친구도 점차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루에 몇 번씩 반복된다면, 인내심이 강한 친구라 해도 지칠 것이다. 결국, 아이들은 "넌 몰라도 돼"라든지 "또 못 들었어?" 같은 귀찮은 투의 대답을 듣게 된다. 이런 경험들이 매일 반복되다 보면, 난청 아이들도 두 번 물어볼 것을 한 번만 물어보게 되고, 결국 못 알아들어도 그냥 알아듣는 척을 하게 된다. 그렇게 소통에서 생긴 작은 오해들이 쌓이면서 난청 아이들은 점차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장애를 감추고, 소극적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 이건 단순히 사춘기의 변화 때문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겪는 소통의 어려움이 누적되면서 생기는 문제였다. 난청 아이들이 겪는 작은 불편함들이 결국에는 관계에서 커다란 벽이 되어 가는 것이다.
청각장애 이해 교육을 할 때마다, 난청 아이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강의 중에 "친구가 자꾸 물어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라고 물어보면 아이들은 솔직하게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어요. 짜증 나고 귀찮아요. 답답해요. 말하기 싫어져요."라고 대답한다. 그럴 때 나는 먼저 그 감정을 이해해주려 한다. "여러분들이 느끼는 답답함은 당연해요. 선생님도 똑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으면 짜증이 나고, 대답하기 싫은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이렇게 그들의 마음에 공감해 준 후, 와우(인공와우)라는 기기가 어떤 한계가 있는지 설명해 준다. "와우는 정말 뛰어난 기기지만, 소음이 많은 환경이나 여러 명이 동시에 이야기할 때, 그리고 멀리서 부를 때는 잘 들리지 않아요. 그래서 난청 친구들이 자꾸 되물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 아이들은 이해하는 눈빛을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가끔 더 깊이 이야기할 필요성을 느낀다. 집에서도 나조차 아이가 자꾸 똑같은 질문을 할 때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중요한 거 아니야." "너 들었으면서 왜 못 들은 척해?" 하고 퉁명스럽게 말할 때도 있다. 엄마인 나도 이런 감정을 느끼는데, 바쁘고 시끄러운 학교에서 친구들이 그런 상황에 더 쉽게 지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난청 아이들을 "보이지 않는 장애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게 없고, 완전통합반에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비장애인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보이지 않는 결함이 있는, 어디에도 딱 맞지 않는 중간지대에 서 있는 아이들이다. 외관만으로는 그들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없고, 그래서 종종 고립감과 소외감 속에 살아가게 된다.
요즘 그래서 고학년 교실에 가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들의 친절함을 최대한 발휘해 보세요. 친구가 자꾸 물어보면 한 번 더 천천히 친절하게 대답해 주면 좋겠어요. 그러면 난청 친구들도 마음 편하게 1년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나의 아이가 고학년이 되어서도 친구들에게 당당하게 묻고, 그 질문에 대해 친절한 대답을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진심을 담아 이야기한다. 꼭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청각장애 이해교육을 준비하다 보면, 난청 아이들 중에서 '배려와 이해'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 사회적 약자는 꼭 친절함을 받기만 해야 될까? 친구들의 친절에 기대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먼저 친절을 베풀 수는 없는 것인가? 사회적 약자라고 받기만 하는 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아이가 어렸을 때 그랬다. 내 아이는 약하게 태어났고, 사회에서 내 아이에 대해 배려해 줘야 한다고.. 그래서 나는 나의 경험에서 비롯된 방어적인 태도를 가르쳤다. "굳이 와우에 대해 묻는다면 매번 친절하게 대답할 필요는 없어. 자신 있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하며 방어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내 경험상 아무리 친절하게 와우를 설명해도, 돌아오는 답변은 늘 "불쌍하다"는 말뿐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래서인지 스스로의 장애를 방패 삼아 "귀가 잘 안 들려서 인공와우라는 기기를 착용하고 있는 거야. 너, 내가 청각장애인인 줄 몰랐냐?"라고 받아쳤다. 처음에 나는 그 당당함을 칭찬했고, 장애를 잘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자신감이 무례함으로 느껴졌다. 단순히 친해지고 싶어서 와우에 대해 물어보는 친구들에게도 아이는 귀찮듯 대답하고, 공격적으로 방어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나 친절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구나. 내가 아이에게 방어만을 가르쳤고, 친절 속에서 오가는 따뜻한 교감을 놓치고 있었음을.
그 후로 당연한 친절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학년 첫날 등교하는 아이에게 아이의 옷을 다듬어주며, 지난밤 나눴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천천히 되새겼다. "잘 안 들리면 친구에게 '다시 한번 이야기해 줄래?'라고 물어보고, 와우에 대해 물으면 '눈이 나쁘면 안경을 쓰는 것처럼, 난 귀가 잘 안 들려서 인공와우라는 기기를 착용하고 있어.'라고 친절하게 대답해야 해." 짧은 문장이었지만, 나는 세 번이나 "친절하게"라는 말을 강조했다. 아이는 귀찮다는 듯 "알았어"라고 대답했고,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도 나는 한 번 더 덧붙였다. "듣는 데 집중하고, 잘하고 와 친절하게."
결국, 장애를 가진 아이든, 그렇지 않은 친구든 모두가 서로에게 친절해야 한다. 약하고 몸이 아픈 아이도 반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나는 우리 아이가 먼저 친구들에게 다가가 친절을 베풀고, 도움이 필요한 친구에게 손을 내미는 아이로 자라길 바란다. 친절은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내 아이가 아침에 베푼 작은 친절이 오후에는 반 전체에 퍼져, 그 반을 따뜻하게 감싸기를 바란다. 내 아이의 다정함이 학급 전체에 스며들고, 그 다정함이 돌고 돌아 결국 난청인 내 아이에게도 따뜻한 말 한마디로 되돌아오는 교실을 꿈꾼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친구들에게 친절을 바란다면, 그 역시 먼저 친구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세상에는 당연한 친절이란 없다. 한쪽 방향으로 흐르는 친절도 없다. 결국 쌍방향인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내일도 다시 아이에게 당부할 것이다. 아이가 약자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배려만을 기대하지 않기를, 오히려 먼저 다정함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신을 돌보고,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길러가는 과정에서, 난청 아이들은 약자가 아니라 사회적 강자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 된다. 하루를 바꾸는 친절은 작은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아침에 친구에게 "머리 잘랐구나, 정말 예쁘다."라고 말하면 그 친구는 하루 종일 반에서 친절을 베풀 것이다. 반대로, "이거 좀 빌려줄래?"라는 질문에 "싫어"라고 대답하면, 그 아이는 하루 종일 부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낼 것이다. 그렇게 부정적인 기운은 반 전체로 퍼질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한 환경을 만들며 살아가야 한다.
장애를 가진 아이든 그렇지 않은 아이든, 서로에게 먼저 친절을 베푸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환경'이 되어주며, 그 속에서 함께 성장한다. 친절은 작은 씨앗과도 같다. 그 씨앗이 자라나기 위해선 먼저 누군가가 물을 주고 돌봐야 하듯, 친절한 말과 행동은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하루와 더 나은 관계를 선물해 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아이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친구들에게 먼저 다정하게 이야기하기" 이 짧은 당부가 우리 아이의 하루를 이끄는 나침반이 되고, 반 친구들에게는 선한 영향을 퍼뜨리기를 바란다. 그전에 무엇보다도 엄마인 나부터 내 아이에게 더 다정해져야 하지 않을까? 가정에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환경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