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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정 Jun 21. 2015

끝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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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가 개었는데 다시 흐려진다. 비  온 뒤 습습한 냄새를 맡으려 창가에 서서, 의미 없는 눈길을 던져본다. 빗소리가 좀 더 듣고 싶어 재주소년의 <봄비가 내리는 제주시청>을 틀어놓은 채로. 비 오는 날에는 어쩔 수없이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떠나온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제는 나와 관계하지 못하는 사람, 사건, 물건이지만 이렇듯 사방의 모든 소리가 가라앉는 날이면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와 고개를 내미는 것들이 있다. 끝났으나 끝내지 못한 관계이거나, 떠나왔지만 돌이켜보니 떠나오지 못한 것이거나, 완벽한 이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저 도망친 것에 불과한, 과거 어디쯤에 두고 온 생의 파편들.  



 무모해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시작이라면, 철없이는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 끝이다. 끝은 조금 더 많은 것을 요구하므로. 그럼에도 나는 철없이 많은 것들과 끝을 내버렸다. 그러니까 내가 떠나온 것들은, 실은 정리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고 해야 맞다. 시작이 어린이에게도 허락되는 영역의 것이라면, 정리가 수반된 성숙한 끝은 어른만이 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할 터. 그렇다면 나는 어쩌면 오래오래, 어른이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의 인생에 관계라는 실로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언가가 묶이기 시작하면 하나의 사건이 된다.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그것을 광의의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면, 관계하는 그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책임이 탄생한다. 책임에는, 먼저 가려는 이를 잘 보내주는 일과 여의치 않게 내가 먼저 떠나야 하는 경우 우리는 여기까지라고 선을 단단히 그어주는 일이 포함된다. 나를 위해서도, 그를 위해서도. 미처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떨치고 와버린다면 몸은 자유로워진 다한들, 마음만은 아직도 그것에 묶여 허우적 거릴 수밖에 없다. 추억이기는 커녕,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지하실 깊숙이 처박아놓은 상자 꾸러미를 바라보는 심정과 같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끝자락이, 아직은 어느 순간에 묶여있다. 시간이 아직은 어느 때에 멈추어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마지막이 내 앞에 놓여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번 장마에는 내리는 빗소리를 오래오래 들으면서, 차 한 잔을 오래오래 마실 것이다. 내 안에서 결별해야 할 것들과 정말로 인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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