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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현정 Jul 02. 2015

다정한 오후의 시간

다정한 오후의 티타임-



침범하는 것은 손바닥 만큼의 볕밖에 없는, 평화로운 오후다. 예상했던 장마가 조금 미루어진 덕분에  며칠분의 다감한 햇살이 내게 주어졌다. 조금 지나면 흐린 날의 연속일터이니, 아쉬운 마음에 차와 아주 약간의 과일을 꺼내놓고 아마 오래 견뎌야 할 장마를 마음으로 대비하고 있다. 예상치 못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던 맑은 하늘에 깜짝 놀라, 곧 지나가버릴 이 소중한 시간의 한 조각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그만 허둥대고 말았는데 무엇으로 채우기보다는 그냥 나답게 느리고 느긋하게 보내자고 생각하였다.



 사두었던 조그만 수첩을 꺼내고 새 연필을 정성스레 깎고서는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 소담한 시간이 눈물겹게 정다워서 과연 내가 누릴 행복인가를 갸웃 고민해보기도 한다.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이런 소소한 기쁨의 조각들은 나를 분에 넘치게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사는 것이 괴롭거나 도무지 기쁨을 느끼지 못할 때면 모퉁이 뒤에 숨어있다가 짠, 하고 나타나는 것만 같다. 소소한 기쁨에 입이 목련처럼 벙글어지는 순간순간마다 나는 신이 있음을 자주 믿게 된다. 



 경멸하 곤했던 빈둥대는 시간을 과분한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게 된 일이 불현듯 생경하게 다가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조금쯤은 너그러워지고 느긋해진 나를 흐뭇하게 발견한다. 쉽게 변하지 않는 게 사람이지만, 또 어느 한 순간의 경험만으로도 쉬이 변하는 게 사람이었다. 여유로워지면 감각이 예민해지므로 집을 나서면 온갖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가령 벽과 벽 사이 틈에서 난 풀 한 포기나 좌판의 할머니가 내어놓은 빨간색 노란색 파프리카 몇 개, 반찬 가게에서 갓 만든 두부 조림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 같은 것들이 그렇다. 세상에 있는 지도 몰랐던 아주 작고 작은 존재들이 말을 걸기 시작하면 나는 잠깐 멈추어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용기가 생기면 카메라에 담고 여의치 못하면 눈에, 마음에 담는다. 지금 나를 이루는 것들은 온통 그런 형태이다. 



 확실히 깨달은 건, 빠르게 걸을 때 얻는 것과 느리게 걸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척이나 다르다는 사실이다. 둘 다 얻을 수는 없으니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낄 건지는 결국 개인의 선택에 따른 문제일 터. 그것이 취향이고 가치관이고 삶의 철학이라 믿는다. 어쩌면 인간은 빠름과 느림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며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바삐 살다가도 어떤 시기에는, 아니 어쩌면 자주 작게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거나 무릎을 쓰다듬어 보아야 하는 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젊은 시기이든 황혼의 시기이든.  



어쩐지 햇살에 취하고 차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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