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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ngo Apr 11. 2021

인도에서 소포 보내기

인도 리시케시 생활 이야기

얼마 전에 인도에서 한국으로 소포를 보냈다.


팬데믹 시대에 감히 한국으로 소포를 부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인도 식당을 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소포를 부치게 되었는데 그 시작은 바로 웃기게도 '참기름 한병' 때문이었다.


지금은 인도의 리시케시에서 머물고 있지만 한 달 전에는 남인도의 케랄라에서 지내고 있었다. 케랄라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는 일본 친구 하나코는 오사카에 살 때 한국 친구의 어머니가 해주시던 잡채와 비빔밥, 김치 등이 참 맛있었다면서 한국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하나코가 음식에 이렇게까지 민감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던 나는 한국 음식을 그녀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사실 나도 채식을 한 이후부터는 맵고 짠 음식을 저절로 멀리하기 시작해서 음식은 가급적 자연스럽고 간단한 것을 만들어 먹고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인기 많은 한국 음식을 제대로 만들어 본 적도 없었다.


때는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였고( 지금은 더욱 심해지고 있지만 ) 일본에서 인도로 소포를 받을 수가 없었기에  하나코의 일본 식자재는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부엌에는 일본 참기름과 김, 일본간장 등 아주 기본적인 일본 식재료가 조금 남아있었는데 내가 잡채를 만든다고 하니 참기름을 써도 좋으나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주의를 부탁한다며 외출을 나갔다.


미리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잡채를 만들 생각을 안 했을 터인데 이미 잡채를 만들 준비를 해 놓았고 태어나서 제대로 된 잡채를 한 번도 만들어보지 않은 나는 망설이다가 인터넷에 있는 레시피대로 참기름 세 숟가락을 넣어 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 더 바닥을 보이고 있는 참기름 병을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이 되었다. 친구에게 당면 대신 쌀국수를 따로 넣은 어설픈 한국 잡채를 만들어 주고 이후에 고추장 대신 두반장을 사서 약간 매운 마파두부까지 해보았으나 친구는 아쉽게도 매운 음식을 거의 못 먹어서 계속 맵다는 말을 이어갔다. 대체 비빔밥이며 김치 이야기는 왜 한 것인지 내가 만든 김치도 맵다면서 물에 씻어 먹을 정도였다. 이후 나의 한국 음식 만들기는 끝이 났으며 그냥 그녀가 해주는 소금 또는 간혹 간장으로만 간이 되어 있는 음식을 함께 먹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자꾸 내가 쓴 세 숟가락의 참기름이 생각나곤 했다. 인도의 수도 델리의 한인 마켓에서 한국 식자재를 받을 수 있을까 하고 조사를 해 보았지만 가격이 아주 비쌌고 적은 식료품을 내가 소포로 받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 친구는 대학로에서 인도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내가 인도 물건을 가끔 보내주기도 했던 친구여서 그 친구라면 내게 참기름과 김, 고추장 등 한국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보내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보내주겠다 하고 참기름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다시 조사를 해보니 한국에서 인도로 물건을 받으려면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물건을 받을 때 세금을 따로 내야 해서 보통 하는 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상황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맛 좋은 한국 참기름을 포기하고 인도 슈퍼마켓에서 인도에서 만든 향이 부족한 참기름과 여러 아시아 소스를 사서 친구의 부엌에 넣어 주었다.


리시케시로 돌아온 이후 한국 친구는 미안하지만 인도 물건을 보내줄 수 있겠냐고 연락을 해왔다. 평소 같으면 직접 인도로 들어와서 물건을 구입했겠지만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인도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정을 잘 알기에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으니 인도 식당에서 카레를 만들 때 쓰는 인도 향신료와 후식으로 씹어 먹는 인도 설탕 그리고 인도 향을 받고 싶다고 했다.



이후 나는 우체국 근처에서 물건을 사면 소포를 부치기에 편하므로 근방에 있는 여러 가게를 돌며 물건을 찾아보았으나 우체국 근처의 작은 가게에는 물건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갠지스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오르막 길을 걸어 올라가면 나오는 대로변에 있는 큰 가게로 가서 물건을 부탁했다. 가게 주인은 가지고 있는 물건의 양이 적으니 더  주문해서 다음 날에 준비해 놓는다고 했다.


다음 날은 주말이어서 하루 종일 쉬다가 저녁 늦게 가게에 가보니 물건이 준비되어 있었다. 옆에서 오가닉 숍을 하고 있는 친구가 알려준 대로 물건을 박스에 담아 불투명한 박스 테이프로 꽁꽁 싸매야 했는데 다행히도 가게에서 일하는 소년과 함께 옹기종기 앉아서 한참 동안 물건을 싸매는 작업을 했다. 시간이 생각보다 꽤 오래 걸려서 가게 주인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니 역시 '노노 노 프라블럼'이라고 한다.



이제는 주소를 종이에 타이핑해서 프린트를 해야 할 일이 남았는데 바로 옆에 타이핑과 프린트를 해주는 곳이 있었다. 익숙지 않은 한국 주소와 한국 이름을 독수리 타법으로 잘 타이핑해 주고 확인 작업까지 꼼꼼히 해주며 신경을 써주어서 다행히 박스에 투명 테이프로 단단히 붙일 수 있었다.  포장 작업을 다 마치고 가게 주인에게 다음 날 아침에 온다고 하고 몇 시에 문을 여냐고 물으니 새벽 6시 반에 문을 연다고 한다. 참 부지런도 하시지.


이제 이 물건을 어떻게 우체국으로 실어 나르느냐가 관건으로 다가왔다. 근방에 우체국이 세 개나 있는데 리시케시는 강이 가로질러 있는 곳이라서 물건을 가지고 긴 다리를 걸어서 건너야 하는 곳을 갈 수 없었다. 박스 두 개의 무게가 총 20킬로가 되기도 하고 크기도 커서 강 건너편에 있지 않은  조금 떨어진 우체국에 가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에 긴장된 마음으로 가게로 가서 물건을 가게 밖으로 뺀 후에 릭샤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움직였으나 역시 예상한 대로 리시케시는 합승 릭샤 시스템이라서 우체국으로 나를 데려다 줄 릭샤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가만있고 싶었으나 나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도와주려고 나온 가게 직원들 때문에 괜히 왔다 갔다 하며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빨간 스쿠터 한대가 내 앞에 서더니 어디를 가냐고 묻는 것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구원해주려고 우연히 나타난 천사는 바로 내가 묵고 있는 호텔 주인이었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며 커다란 박스 두 개를 가리키고는 우체국에 가야 한다고 말하니 기꺼이 태워준다고 하였다. 어제 테이핑을 도와준 소년이 한 개에 10킬로인 박스를 그에게 턱 하고 주니 작은 스쿠터에 들어가지 않았다. 소년과 호텔 주인은 힘을 합쳐 스쿠터 앞의 빈 공간에 에 박스를 힘으로 눌러 넣었고 다른 10킬로 박스는 내가 안고 뒷자리에 탔다. 내리막길로 내려가는 스쿠터에서 중심을 잡으며 내가 안고 있는 커다란 박스가 운전을 하고 있는 그에게 닿지 않게 힘을 주어 잡고 몸을 맡겼다. 드디어 시바난다 아쉬람 안에 있는 우체국에 도착했고 계단을 내려가서 건물을 한참 돌아가야 있는 우체국 내부까지 짐을 함께 들고는 우체국 직원에게 한국으로 물건을 부치러 왔다는 설명까지 해주고는 환한 얼굴로 떠나가는 그에게 고맙다며 한참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내가 가지고 온 커다란 박스 두 개와 나를 쳐다보던 우체국 직원은 나에게 밖으로 나가서 한 바퀴 돌아 창구 앞으로 오라고 하며 우체국 문을 닫았다. 내가 박스를 들고 들어갔던 우체국 내부는 직원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고 대신 갠지스강 앞으로 나 있는 바깥 창구에서 우편물을 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가본 우체국에서 길을 헤매기가 싫어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다시 한번 묻고는 태양이 정통으로 내리쬐는 갠지스강 바로 앞에 있는 창구로 가서 줄을 섰다. 그날 소포를 보내는 사람들이 꽤나 많아서 땀을 줄줄 흘리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들고 온 두 개의 박스는 우체국 한쪽 책상에 놓여 있었고, 나의 존재를 잊었으면 어떡하나 생각하며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찰나에 다행히도 내 박스가 이쪽에 놓여 있으니 다음 차례라고 말해주는 한 우체국 직원분 덕분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보니 내 차례가 되었고 한참 동안 박스를 들어 올려 무게를 재고 주소가 제대로 적혀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을 지켜봤다. 차근 차근 일을 진행하던 우체국 직원은 내용물이 무엇인지를 박스에 왜 쓰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하고는 역시 독수리 타법으로 익숙지 않은 한국 주소와 이름을 우체국 사이트에 등록하기 시작했다. 편지 봉투 하나를 보내려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뒷사람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소포 보내기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드디어 소포를 보낸다는 영수증이 프린터로 나왔고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잔돈을 챙겨 우편료를 치렀다.



이렇게 인도에서 소포 부치는 일은 끝이 났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항공편이 많지 않아서 웬만한 소포는 보통 한 달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물건은 내 손을 떠났고 그 뒷일은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숨을 놓았지만 이번 경험으로 인도에서 소포 부치기는 어렵지만 옆에서 도와주는 인도 친구들 덕분에 쉬운 일이라는 것도 다시 한번 알게 된 즐거운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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