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도시 여행 3 :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さっぽろ)
네온사인이 유혹하는 밤
삿포로의 해가 지면, 거리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낮의 평범한 관광지 풍경은 사라지고, 붉은 등불과 형광 간판들이 하나둘 켜지며 현지인들의 진짜 시간이 시작된다. 스스키노 일대로 퍼져나가는 고기 굽는 냄새와 맥주잔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골목마다 스며나오는 따뜻한 불빛들. 이곳에서 나는 삿포로만의 독특한 미식 문화를 경험해보기로 했다.
삿포로 미식의 매력
삿포로는 홋카이도의 중심지답게 신선한 해산물과 유제품, 그리고 추운 기후에 어울리는 따뜻한 요리들로 유명하다. 라멘, 징기스칸, 카이센동(해산물 덮밥), 스프 카레, 그리고 홋카이도산 크랩까지. 하지만 이런 유명한 음식들 사이에 숨어있는 진짜 로컬 맛집들이야말로 삿포로 여행의 진짜 묘미다. 특히 밤이 되면 작은 이자카야들과 야키토리 가게들이 문을 열며, 현지인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생긴다.
첫 번째 만남: 다루마 본점의 징기스칸
스스키노 거리를 걷다 보면 유독 눈에 띄는 간판이 하나 있다. 주황색 호랑이 마스코트가 당당히 서있는 '다루마 본점(だるま本店)'. 1954년부터 이어온 삿포로 징기스칸의 원조 격인 이곳은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성지로 통한다.
하지만 찾아간 시간이 마침 저녁 피크타임이었다.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현지인보다는 관광객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줄을 서서 기다릴 수도 있었지만, 굳이 다루마가 아니어도 맛있는 징기스칸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다른 가게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
또 다른 징기스칸의 세계: 유우히(ゆうひ)
다루마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지만, 삿포로에는 현지인들만 아는 또 다른 징기스칸 명소가 있다. 바로 '유우히(ゆうひ)'다. 원래는 퇴근 후 한 잔하러 오는 직장인들과 동네 단골들로 채워지던 곳이었는데, 최근 홋카이도가 한국과 중국의 인기 관광지로 떠오르면서 이곳도 외국인 관광객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철판 위의 작은 극장
웨이터가 가져온 징기스칸 세트를 보는 순간, 왜 이 요리가 삿포로의 대표 음식이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둥근 철판 중앙의 볼록한 부분에는 붉은 양고기가, 가장자리에는 양배추, 콩나물, 양파, 피망이 둘러싸고 있었다. 마치 작은 무대 같았다. 철판이 달궈지자 양고기에서 나오는 기름이 자연스럽게 아래쪽 채소들로 흘러내렸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고기의 향이 터져 나왔다. 홋카이도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자란 양의 깊은 풍미가 코끝을 자극했다.
결국 한 점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웠다. 징기스칸 요리를 먹기로 결정했지만, 혼자 가게에 들어가서 직접 구워 먹어야 하는 부분 때문에 망설였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상 자리에 앉아 먹기 시작하니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카운터석에 혼자 앉아 눈치 보지 않고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오히려 편했다. 이렇게 징기스칸 요리를 마무리하고, 조금 더 삿포로의 밤을 즐겨보기로 했다.
두 번째 목적지를 찾아서
이제 2차로 향할 시간이었다. 스스키노에서 오도리 공원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15분 정도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적당히 든든해진 배를 가라앉히고, 술기운으로 후끈해진 몸을 식히며 거리를 걸으니 다시 차분해졌다.혼자 여행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테이블석에서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곳을 찾게 된다. 그때 문득 예전에 본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성시경과 마츠시게 유타카가 함께 방문했던 그 야키토리 가게 말이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아늑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오늘 밤은 그런 분위기를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다. 스마트폰으로 구글 지도를 열어 주변의 야키토리 가게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골목 깊숙한 곳의 작은 보석 : 키스무 혼테이(炭火鳥焼 蔵鵡 本邸)
결국 다시 스스키노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삿포로에서 제대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곳은 역시 이곳이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익숙한 거리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해졌다. 미로 같은 스스키노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매며 걸었다. 좁은 골목 사이사이로 스며드는 불빛과 각종 가게 간판들이 현란했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목적지를 찾겠다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그리고 드디어, 키스무 혼테이(きすむ本店) 앞에 서게 되었다. 첫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간판이 눈길을 끌었다. 여느 야키토리 가게와는 확연히 다른, 세련되고 품격 있는 분위기가 간판만으로도 느껴졌다.
완벽을 향한 집착
"오늘의 추천은 뭔가요?"
마스터가 추천해준 것은 의외로 심플한 야키토리 두 개와 생계란이었다. 하지만 접시에 나온 요리를 보는 순간, 그 단순함 속에 숨어있는 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꼬치 표면의 황금빛 색상이 완벽했다. 숯불에서 천천히 구워져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식감을 자랑했다. 달콤짭짤한 타레 소스가 살짝 발라져 있어 한 입 베어물 때마다 진한 감칠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건 그 옆의 생계란이었다.
"이렇게 드세요." 마스터가 시범을 보여주었다. 뜨거운 꼬치를 생계란에 살짝 담갔다가 먹는 것이었다. 계란의 부드러움이 꼬치의 짭짤함을 감싸면서 완전히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다.
네온사인이 만드는 특별한 분위기
삿포로의 밤거리에서 느낀 것은 음식 그 자체를 넘어선 무언가였다. 유우히의 소박하지만 정감 가는 네온사인, 그리고 키스무의 은은한 등불까지. 각 가게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현지인들과의 자연스러운 소통이 이루어졌고, 추운 밤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뜨거운 음식들이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가게 주인들과 손님들 사이의 끈끈한 관계였다. 단순히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라, 하루의 피로를 풀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관광객과 현지인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같은 테이블에서 징기스칸을 굽고, 꼬치를 나누어 먹는 모습에서 삿포로만의 독특한 포용력을 느낄 수 있었다. 삿포로의 밤거리 맛집들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곳이 아니었다. 가게마다 고유한 이야기와 철학이 있었고, 홋카이도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창이었으며, 여행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다음 삿포로 여행에서는 또 어떤 숨겨진 맛집을 발견하게 될까. 벌써부터 그 순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