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도시 여행 4 : 홋카이도(北海道) 비에이(美瑛町)
하얀 침묵이 흐르는 대지
끝없이 펼쳐진 언덕 위로 눈이 내려앉아, 마치 거대한 흰 담요를 덮어놓은 듯하다. 겨울의 비에이는 크리스마스트리, 흰 수염폭포 등 유명한 명소들로 가득하다. 이곳들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버스투어나 택시투어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기차만으로는 진짜 비에이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어가 주는 편리함과 안내의 즐거움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길을 택했다. 기차 창가에 몸을 맡긴 채 순백의 캔버스를 천천히 감상하기로 한 것이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 사이로, 때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들 사이로, 비에이만의 고요한 아름다움이 스며들어 올 것이라 믿으며.
여행자의 시간 계산법
삿포로에서 비에이까지, 기차는 대략 2시간의 여정을 그려낸다. 하지만 여행에는 단순한 이동 시간 이상의 것들이 필요하다. 환승을 위한 대기, 플랫폼에서의 잠깐의 망설임, 그리고 낯선 역에서의 방향 찾기까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면 편도 3시간 정도가 흘러간다.
당일치기라는 선택지 앞에서 잠시 계산기를 두드려본다. 왕복 6시간. 하루 중 절반을 기차 안에서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이들은 이를 비효율적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때로는 목적지보다 그 길 위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설원, 기차 안에서 마주치는 여행자들의 표정, 그리고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그 설렘 자체가 이미 여행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물론 비에이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롭게 그 하얀 침묵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니까.
여유라는 이름의 사치
삿포로의 경계선을 넘어서자마자, 세상이 달라진다. 도시의 회색빛 건물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순백의 설원이 차지한다. 아직 외곽으로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 풍경이라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다.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의 톱니바퀴에서 한 발짝 물러나, 기차 좌석에 몸을 맡긴 채 세상을 구경하는 이 기분.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니 영화보다 더 생생한 현실을 감상하는 특별함이 있다.
이런 분위기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미리 준비해 온 맥주 캔을 따른다.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순간,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이 울린다.
창밖의 하얀 세상과 손 안의 시원한 맥주, 그리고 어디론가 향해 달려가는 기차의 리듬. 이보다 더 완벽한 여행의 시작이 있을까 싶어 혼자 미소를 짓는다.
홋카이도식 처방전
눈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즐기는 것도 분명 낭만적이다. 하지만 잠깐, 여기는 홋카이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당연히 맥주 아니겠는가.
물론 최근 건강검진 결과지에는 빨간 불이 여러 개 켜져 있다. 의사는 금주를 권했고, 가족들은 걱정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창밖으로 펼쳐진 홋카이도의 설원을 바라보니 새로운 처방이 떠오른다.
'여행 중 적당한 음주는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며, 특히 홋카이도의 청정한 공기와 아름다운 풍경은 알코올 분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식으로 혼자만의 의학적 소견을 내려본다. 당연히 어떤 의학 논문에도 나오지 않을 황당한 이론이지만, 지금 이 기차 안에서만큼은 가장 합리적인 처방전이다.
캔을 따는 소리와 함께, 오늘 하루만큼은 내가 내 몸의 주치의가 되기로 한다.
중간 기착지, 아사히카와
삿포로에서 1시간 30분을 달리면 종착역인 아사히카와역에 닿는다. 여기서 한번 숨을 고르고, 다시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비에이까지는 30분가량 더 가야 하는 길이다.
플랫폼에 잠시 내려서니 공기가 한층 더 차갑다. 여름의 비에이와 후라노는 보랏빛 라벤더로 온 세상을 물들이는 곳이지만, 겨울은 다르다. 지금은 온통 눈이 주인공인 계절이다.
환승을 위해 기다리는 동안, 아사히카와역의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친다. 곧 도착할 비에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눈꽃이 그려내는 파노라마, 그 하얀 캔버스 위에서 만날 풍경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두 번째 열차가 들어온다. 이제 정말 마지막 구간이다. 30분 후면 눈의 나라 비에이가 나를 맞아줄 것이다. 다시 창가 자리에 앉아 여행의 클라이맥스를 준비한다.
마법이 걸린 풍경
눈이 너무 예쁜 탓일까. 길에서 마주친 집배원조차 한 폭의 그림 같다. 평소라면 그저 스쳐 지나갔을 일상의 한 장면이, 이곳에서는 영화의 한 컷처럼 느껴진다.
빨간 우체통을 배경으로 서 있는 집배원의 모습마저 멋진 분위기를 연출한다. 하얀 눈이 내려앉은 모자, 김이 나는 입김, 그리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그 뒷모습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구도를 만들어낸다.
정말 이곳은 마법이 걸린 듯하다. 셔터만 눌러도 예쁜 사진이 만들어지는 곳. 아니, 어쩌면 카메라 없이 그냥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순간들이 계속 펼쳐지는 곳이다.
비에이의 눈은 단순히 풍경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상까지도 특별하게 바꿔놓는다. 이런 게 바로 여행의 마법이 아닐까. 평범한 것들을 특별하게 보게 만드는, 그런 힘 말이다.
짧았지만 충분했던 시간
날은 춥고, 버스투어나 택시투어도 신청하지 않은 채 걸어서 온 뚜벅이 여행객이었지만, 이제 다음을 기약하며 소중한 눈구경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아사히카와로 돌아가는 기차에 몸을 맡긴다.
너무 짧아서 아쉽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슴 한편이 따뜻하다. 마음속에 넘칠 만큼 무언가가 차오른 느낌이다. 길지 않았던 시간 동안 본 것들이, 느낀 것들이, 이렇게 풍성한 여운으로 남을 줄 몰랐다.
정말 좋았다.
힐링이라는 게 거창한 것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한다. 멀리서 온 눈을 바라보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집배원의 뒷모습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것.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도 여전히 창밖의 설원이 펼쳐진다. 이번엔 반대 방향이지만, 그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는다.
실용적인 비에이 여행법
마음이 차분해지는 겨울의 비에이를 제대로 여행하고 싶다면, 현실적인 선택지들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뚜벅이 여행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추위와 시간의 제약을 생각하면 버스투어나 택시투어가 더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버스투어는 마이리얼트립이나 클룩 같은 플랫폼에서 인당 7만 원 정도면 이용할 수 있다. 여러 명소를 효율적으로 둘러볼 수 있고, 가이드의 설명까지 들을 수 있어 알찬 여행이 된다.
택시투어는 좀 더 자유로운 선택이다. 코스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지만, 기사와 협의를 통해 10,000엔 정도로 주요 포인트들을 돌아볼 수 있다. 다른 여행객들의 후기를 살펴보니, 크리스마스트리를 중심으로 몇 곳만 빠르게 둘러보는 코스라면 10,000엔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10,000엔이라면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금액이다. 추위에 떨며 걸어 다니는 대신, 따뜻한 택시 안에서 여유롭게 설경을 감상할 수 있다면 오히려 더 값진 투자가 아닐까.
다음 글을 또 언제 작성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다음편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