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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Sep 18. 2020

위기를 극복하려는 치열한 노력에 관하여

링컨에게서 배우는 대통령의 리더십 (2편)


(1편에 이어)


< 청년 링컨 >


마침내 21살에 링컨은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하게 됩니다. 메사츄세스주 뉴 세일럼이라는 작은 도시의 잡화점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생면부지인 그곳에 처음 도착한 이방인이었지만 그는 8개월 만에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로부터 주의회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요? 


그건 바로 링컨의 사교성 때문입니다. 이곳 뉴 세일럼에서 잡화점 직원으로 근무했던 링컨은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훗날 정치적 이력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아주 이상적인 기반을 닦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잡화점은 경계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 잡화점은 식료품과 의류 등을 판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식과 사교의 중심지”라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죠. 원래 동네에 사람들이 오가며 소식이 들끓는 곳이 생기게 마련이잖아요. 바로 이 잡화점이 그런 곳이었고 당시 정치가 시민들에게 흥미롭고 보편적인 관심사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정치토론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수많은 소식이 오가고 소문이 들끓던 곳에서 링컨의 사교적인 성품과 입담은 그를 아주 매력적인 점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사교성과 독서로 다져진 체계적인 기반에 주민들은 호감을 갖기 시작했고, 끝없이 질문하고 배우려는 학습욕구에도 깊은 인상을 받게 됩니다. 덕분에 동네 주민들은 링컨의 성공을 응원했고 많은 책들을 빌려주면서 그를 도왔습니다.


링컨은 굉장히 솔직했다고 합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을 했다고 합니다. 살다 보면 모른다고 말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링컨은 이른 나이에 깨닫게 되어 지적 성장의 임계점을 넘어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저에게는 굉장히 자극되더라고요.




이 책을 읽어보면 정치인이 처음 출마할 때 출마의 변을 발표하는데 그 첫 공식 스피치가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국회의원의 경우 초선의원의 첫 본회의 연설이 역사 속에서 많이 회자되곤 하죠. 링컨은 첫 주 의원 출마의 변에 굉장히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링컨은 휘그당으로 출마하게 되는데, 당시 민주당이 압도적이었던 지역에서 휘그당으로 출마하였기에 선거에서의 패배가 확실시되었다고 합니다. 링컨은 뉴 세일럼 같은 작은 도시의 도로와 수로와 같은 인프라 발전과 교육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어필했습니다.

(휘그당 : 나중에 노예 해방 정책에서 휘그당의 찬반에 엇갈려 당론을 정하지 못하는 것에 분노해서 휘그당을 탈당하게 되고 함께한 동지들과 만든다이 바로 지금의 공화당입니다.)


첫 선거에는 큰 표차이로 패배를 맛보게 됩니다. 다행히 그는 패배로 인해 “희망이 꺾이지도 않았고 야망이 위축되지도 않았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2년간 지역에서 열심히 일하며 정치인으로서의 텃밭을 다듬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지역구를 다니며 지역 민심을 듣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에 스며들게 되는 것이죠. 이런 과정을 통해 25세에 주의회에 입성하게 됩니다.



처음 주의회가 개회하는 동안 링컨은 전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그는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의회의 운영을 학습하면서 의회의 생태계를 하나씩 알아갔습니다. 여러 의원들의 토론을 지켜보면서 민주당과 휘그당의 이념적 차이를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링컨은 법학적 지식이 정치 이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첫 회기가 끝나고 휴회기간에 본격적으로 법을 공부하게 됩니다. 법을 공부하면서 링컨은 존 스튜어트라는 동료의원이자 변호사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인물이 또 그의 인생에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어주는 인물이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회기가 시작되었을 때 링컨은 전혀 다른 의원이 되어있습니다. 내면에서 무언가 깨어난 듯 그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법률 용어를 마스터했고, 법안을 작성하는 또렷한 글씨체가 빛을 발하게 됩니다. 또한 발언권을 얻어 진행되는 의사발언에서는 뛰어난 웅변 능력을 보게 됩니다. 그는 현장에서 겪어본 많은 경험을 토대로 생생한 비유와 은유로 사람들의 뇌리에 자신의 말을 각인시켜갑니다.

그는 당시 의회에서 두 번째로 젊은 의원이었는데 휘그당 전당대회에서 소장파(젊은 리더) 리더로 선출됩니다. 그의 연설 능력과 상대당의 의도를 직감하는 능력을 타 의원들이 높게 산 결과였습니다.


링컨은 이렇듯 화려한 언변으로 휘그당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혀가며 민주당과의 수많은 토론과 논쟁에서 관심을 받습니다. 당시 토론은 치열한 공격전으로 주먹다짐이 잦았고 가끔 총을 뽑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가 정확히 당시 링컨의 발언들을 수집해 볼 수는 없었지만 20대 링컨의 토론 자세는 아마도 Sarcastic이라는 (빈정대는, 비꼬는) 투로 상대의 성질을 자극하며 자신의 논리를 편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링컨은 정치인의 초기에도 도덕적 용기와 신념을 야망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20대의 링컨의 마음속에 형성된 리더십을 보면, 리더는 자유와 평등과 기회에 대한 추종자들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링컨은 밑바닥에서 시작했지만 6년 만에 주의회에서 존경받는 리더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또 공공사업을 위해 투쟁하는 인물이었고, 교육정책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정치 초년병으로 본다면 엄청난 성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의 원대한 야망에 견주어보면 아직 시작도 아니었습니다.




< 위기 - 죽지 않으면 낫겠지요 >


리더의 성장과정을 연구한 학자들은 회복탄력성, 즉 좌절한 경우에도 야망을 유지하는 능력이 리더십의 성장 가능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1840년. 링컨의 나이 32세 겨울. 그는 심각한 우울감에 빠져있었습니다. 그가 우울감에 빠진 이유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공적인 명예에 관한 부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그가 일리노이주 주 의원으로 당선된 후 그는 철도, 운하, 다리와 같은 지역의 인프라 발전에 많은 노력을 쏟습니다. 하지만 일리노이주의 불경기가 3년째 접어들게 되자 그가 추진했던 공사들의 진행이 중단되게 됩니다. 일리노이주의 확대하는 꿈을 꾸고 지지한 핵심 인물이었던 그는 공사 중단에 따른 비난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일리노이주는 엄청난 빚 때문에 무력증에 빠졌고 신용등급도 하락하게 됩니다. 당시 일리노이주로 들어오는 새로운 개척자들의 수도 급감하게 되죠. 땅값이 추락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게 되고 금융권들도 문을 닫습니다. 이런 사태에 책임을 느낀 링컨은 자신이 유능한 재무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이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며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게 되자 링컨은 임기가 끝나면 주의회에서 은퇴를 하겠다고 발표합니다.   


     개인적인 명예심에 타격은 입은 것입니다. 연애에 관한 것입니다. 이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인데요. 결혼을 준비 중이었던 메리 토드와 파혼을 하게 된 건입니다. 메리 토드는 켄터키주 상하원 의원을 지낸 부유한 휘그 당원의 딸이었습니다. 그녀는 링컨과 달리 어려서부터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 여성이었죠. 처음 링컨은 그녀의 이런 모습에 끌려 사귀게 되었는데, 교제가 결혼으로 진전되자 링컨은 그녀의 변덕스러움과 자신이 과연 아내를 기쁘게 해 주고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대해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이 가족의 부양에 따라 방해받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 거죠. 어린 시절 안정적인 가정에서 살아보지 못한 링컨은 선뜻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약혼을 취소하게 됩니다.   


32세에 맞이한 이런 좌절은 그의 삶에서 가장 큰 위기였고, 이후로도 계속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당시 주변에서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링컨이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고 표현하고 옆에서 지켜보기 끔찍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정신적 위기 속에서 링컨을 건져 올린 것은 바로 그의 마음속에 깊이 품고 있던 신념이었습니다. 그 신념은 바로 “미국인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업적을 자신의 이름으로 남기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신념이 그를 구해냅니다.


그는 주의회를 떠난 뒤, 지역의 유력한 변호사인 스티븐 로건과 새롭게 파트너십을 맺고서는 로건을 멘토 삼아 법학을 제대로 공부하게 됩니다. 훗날 링컨은 그를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라고 평가하는데, 로건은 링컨에게 “어떻게 시작하느냐가 결과를 결정짓지 않는다. 결과는 중년까지 얼마나 노력하고, 그 노력을 유지하는데 달렸다.”라고 그를 일으켜세웁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링컨은 위기를 딛고 일어서며 경제적인 부분까지 회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능력이 생기면서 가족부양에 대한 의혹이 줄게 되고 다시 메리 토드에게 구혼하고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링컨같이 훗날 회자되는 위대한 인물도 경제적인 안정성과 가족이라는 구심점이 바탕되지 못하면 어떤 일도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은 진리인 거죠.




그에게 다시 정치적 야심의 희망이 움트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일리노이주의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하면서입니다. 결국 그는 1846년 일리노이주 하원의원으로 당선이 됩니다. 그의 나이 37세였습니다. 1834년 주 의원으로 처음 당선되고서 12년 만에 하원의원으로 당선이 되는 거죠. 우리나라로 치면 20대에 시의원에 당선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시작했다가 시의회를 넘어 국회의원에 도전한 지 12년 만에 당선이 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물론 여기서부터 링컨이 평탄한 길을 걷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1846년 그의 나이 37세, 앞서 말씀드렸던 2년간 하원의원 생활을 시작하고 하원을 마친 48년부터 대통령이 되는 1860년까지 12년간 그는 선거에서 낙선의 길을 걷습니다. 물론 하원을 마친 48년부터 53년까지 5년간은 공적인 삶에서 완전히 물러난 시기입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열심히 변호사로 활동하며 직업적으로 또, 지적/도덕적으로 성장을 합니다. 


이 5년의 기간을 이 책에서는 제법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데 이때 그의 나이 40~45세의 시기입니다. 그 기간 그는 근면성과 학구열로 자기 계발에 열정을 쏟습니다. 정치를 하느라 체계적으로 다듬지 못했던 법학에 전념하며 당시 법조인들과 같이 카운티를 유랑하며 마을과 소도시에서 재판을 열고 사건을 심리합니다.  이 순회재판에 참여하면서 링컨은 학습에 필요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게 되고 변호사 업무를 넘어서는 여러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철학 / 천문학 / 자연과학 / 정치 경제 / 역사 / 문학 / 시학 / 연극 등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또한 수학에도 열심히였다고 합니다. 


저는 그가 40대가 되면서 무르익어가는 이 부분이 가장 감동적이었습니다. 저 역시 지금 미국나이로 마흔셋 우리나라 나이로 마흔다섯인데요. 아직 늦지 않은 거죠. 물론 지금은 당시보다 피지컬적으로 훨씬 더 젊으니 아직 충분히 성장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링컨을 통해서 동시에 얻었습니다.  

그리고 링컨은 착실히 내공을 다지면서 다시 정치계로 복귀하게 됩니다. 물론 그의 내공은 강해졌지만 세상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1855년 46세에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해서 낙선, 이듬해인 1856년 부통령 후보 경선 낙선합니다. 그리고 1858년 상원의원에 출마해 당시 유명 정치인이던 스티븐 더글라스와 경쟁을 벌이게 되는데 결국 링컨은 낙선합니다. 하지만 스티븐 더글라스와 경쟁하면서 붙었던 토론/ 그야말로 썰전었는데 이 토론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는 링컨의 내공이 터지는 순간입니다.


1856년 미국 지도 (붉은색 - 노예폐지, 검은색 - 노예 찬성, 초록색 - 개척지)


이 토론을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의 법을 알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입니다. 1854년 미국이 캔자스와 네브래스카 준주를 창설하여 새로운 토지를 개방하는 법인데, 개척자들이 노예제도 인정여부를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게 허용한다는 법입니다. 당시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동부지역은 상업이 발달하게 되면서 자유주(노예해방)로 되어있고, 남부는 목화 농업이 번성하면서 대지주들이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노예들을 일꾼으로 부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시면 남부는 노예제를 허용하고 있었는데 새롭게 개척되는 토지에 노예제를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개척자들이 정하자는 취지의 법이었습니다. 이 법을 고안한 사람이 바로 위에서 링컨과 경쟁을 벌린 일리노이주 출신의 스티븐 더글라스인데요. 그는 사실 20대 링컨이 뉴 세일럼 잡화점에서 일할 때 토론을 하며 알고 지내던 인물이었습니다. 스티븐 더글라스는 그때 이후 지속적으로 정치적 입지를 굳혀 굉장히 유명한 정치적인 인물이 되었고, 훗날 대통령 후보로 링컨과 경쟁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링컨이 순회재판을 하던 중 연방의회에서 이 캔자스 - 네브래스카 법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노예제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깊게 파고들어 이 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분석과 근거를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이 깊은 연구를 통해 링컨은 멋지게 정치계로 복귀하고 비록 상원의원 선거에서 스티븐에게 패배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노예제의 토론에서 멋진 썰전으로 그는 청중의 지지를 받게 되고 그 뉴스가 전국으로 퍼지면서 국민들의 지지와 환호를 받게 됩니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진 케이스죠.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링컨은 개인과 리더로서 평판이 달라지는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기 여러 자료들을 찾아보면 모두 링컨의 토론과 연설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그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링컨은 대중에게 다가가기 편한 말투와 쉬운 용어, 현실적인 사례를 바탕으로 쉽고 명쾌하게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제가 느끼기에 현재 우리나라에 그렇게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신데  대표적으로 유시민 작가님이 생각나네요. 아마도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주장을 펼쳐가는 논리면에서 말이죠.


이런 오랜 기다림의 끝에 링컨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그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죠. 링컨에게는 열렬한 야망만큼이나 날카로운 정치적 본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명의 유명한 상대를 꺾고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려면 굽히지 않는 단호함과 더불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주제넘게 서두르지 않고 신중하게 때를 기다리며 당의 입장을 대변하며 당원들의 지지를 얻습니다.

그 오랜 기다림은 결국 그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고 16대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 우뚝 서게 만듭니다.

처음 하원의원으로 보낸 실망스러운 시간과 젊은 시절의 좌절은 그를 깊은 우울증에 빠뜨렸지만, 상원으로서의 두 번의 도전과 실패는 그를 우울증에 빠뜨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패배를 통해 그는 더욱 노예폐지 운동에 매진하게 만들었고 학습과 설득하는 사람으로 바꾸었습니다. 



(3편에 계속)


#링컨 #대통령 #리더십 #대통령의리더십 #링컨의리더십


참고 - 책 <혼돈의시대 리더의탄생>이 궁금하시면 아래 영상 클릭!!!

https://youtu.be/SBmbGNyKi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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