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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Oct 08. 2020

"자유"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가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0205]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이틀째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제법 진도가 더딥니다. 생각을 곱씹어 볼만한 문장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고, 또 잘 알지 못하는 서양(특히 그리스, 그리고 동로마 -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 그 외 잡다한 배경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작가 니코르 카잔치키스의 엄청난 배경지식들과 뛰어난 글솜씨는 차치하고서라도, 주인공 "나"와 주인공을 두목이라 부르는 "알렉시스 조르바" 이 두 인물의 대화가 너무나 멋집니다. 특히, 조르바의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마치 활어 횟집에서 갓 잡아 올린 생선이 내 손아귀에서 힘차게 펄떡거리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200 페이지 정도를 읽은 이 시점에 조금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배운 것 없이 경험이 전부인 조르바의 말이 너무 거창하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솜씨는 청산유수이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나 구절들은 노동자나 평민의 단어가 아닌 한껏 배운 사람의 문장이 깊숙이 내재되어 있다고 느껴집니다. 물론 말투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요. 당시 사람들은 종교에 심취하고 성경을 많이 읽어서 (그걸 제가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암튼 읽다가 제가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처음 조르바를 읽었던 20여 년 전에는 단순히 조르바를 "바람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 희미한 기억 속에 탄광, 속물, 화냥년, 바람둥이, 담배, 럼주 이런 단어들이 남아있거든요.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의 나이 65세, 지금으로 치면 거의 7~80세 노인 아닐까요? 이런 분이 여자 없는 삶을 꿈꿔본 적 없고, 기분에 흥하고 취하며 노래, 춤, 술, 여자 그리고 자신에 대한 책임감으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모습을 통해 작가 카잔차키스는 우리에게 진짜 심장이 두근거리고 혈관이 펄떡거리는 참 삶을 일깨우려 한다는 것에 경외감을 느낍니다.


이 책을 다 읽더라도 저는 아마 작가가 의도한 바를 1/100도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머리와 마음속에서 모호하게나마 그려지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자유"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생각해 온 자유는 "구속"의 반대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어가면서 좀 더 차원 높은 "자유"에 대해 고민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책 초반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내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았다. 나는 이 새로운 인생에 책 부스러기를 동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 달쯤 전에 내가 바라던 기회가 왔다. 내게는 리비아에 면한 크레타 해안에 폐광이 된 갈탄광 한 자리를 빌려 둔 게 있었다. 나는 책벌레 족속들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 여행이 신비로운 의미를 갖는 것이기나 한 듯이 들뜬 마음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내 삶의 양식을 바꾸려고 결심했던 것이었다. 나는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이제껏 너는 그림자만 보고서도 만족하고 있었지? 자, 이제 내 너를 본질 앞으로 데려갈 테다.


이 문장에서 읽히는 것이, 주인공은 백면서생의 삶을 뒤로하고 몸을 움직여 자신의 본질에 닿아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어쩌면 그는 지금껏 책 속에서 진리와 자유를 탐했었는데, 실상 그 바깥 현실에 그가 알지 못하는 그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체감하고 실행으로 옮기는 결단을 한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 안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나서 나누는 대화가 정말 기가 막히는데, 사실 이 대화 속에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요지가 다 들어있습니다.


내겐 계집도 새끼도 강아지도 없어요. 그러다 심드렁해지면 당신은 산투르도 치고...

기분 내키면 치겠지요. 내 말 듣고 있소? 마음 내키면 말이오. 당신이 바라는 만큼 일해주겠소. 거기 가면 나는 당신 사람이니까. 하지만 산투르 말인데, 그건 달라요. 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 제임베키코, 하사피코, 펜토잘리도 출 수 있소. 그러나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자유라는 거지!

    

결국 나 자신 외 다른 인간은 자신을 옥죌 수 없다는 것을 내비칩니다. 조르바는 시작부터 주인공에게 "너와 함께 일은 하겠는데, 나에게 뭘 시키려고 하지 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주관대로 일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현재 우리의 모습과 상당히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당신은 어떠한가요?


 



또 있습니다.


나는 생각했다. <자유라는 게 뭔지 알겠지요?> 금화를 약탈하는 데 정열을 쏟고 있다가 갑자기 그 정열에 손을 들고 애써 모은 금화를 공중으로 던져 버리다니...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정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얼까?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자유"라는 단어가 가진 가치관에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두목, 인간이란 짐승이에요. 단장으로 자갈을 후려지며 그가 말을 이었다.

짐승이라도 엄청난 짐승이에요. 그런데도 두목은 이걸 알지 못해요. 당신에겐 이 인간이라는 것, 세상사라는 것이 너무 어려웠던 모양인데... 내게 물어봐요! 짐승이라고 대답할게요. 이 짐승을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 갈 거요. 두목, 거리를 둬요! 놈들 간뎅이를 키우지 말아요. 우리는 평등하다. 우리에겐 똑같은 권리가 있다. 이따위 소리는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 권리까지 빼앗고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할 거요. 두목,  좋은 걸 다 걸고 충고하건대, 거리를 둬요!

"하지만, 조르바, 당신은 아무것도 안 믿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도 대들었다.

안 믿지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두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가 나락으로 떨어질게요.

이토록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직설적이고 직관적으로 표현해놓은 문장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조르바는 오로지 자신만을 쳐다보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와! 멋지다.' 연신 이런 생각으로 책장을 넘기지를 못했네요.




이 외에도 수많은 문장들이 책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책을 펼쳐내어 몇 줄 읽어봐도 죄다 우리들의 삶이 속박의 연속이고 이것을 깨어내야 진정 "자유하는 삶"이 펼쳐진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제 생각입니다. ^^)



이 글에서 묘사되는 알렉시스 조르바의 눈은 크고 굵고 희번덕거리고 핏발이 서있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는 조르바의 눈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새롭고 영롱하게 보이는 아이의 눈이라고 생각합니다.


꽤 오래전 번역가 이미도 씨를 강연장에서 만난 적 있습니다. 책상 두 개 정도의 거리를 두고 가까이 앉아서 들었던 강연이라 그의 살아있는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를 살필 수 있었는데, 제가 가장 놀랬던 것이 바로 그의 눈이 아이처럼 맑고 초롱초롱했다는 것입니다. 조르바를 다시 읽으면서 이미도 씨의 눈을 떠올렸습니다. 물론 나도 그런 눈을 갖고 싶네요. (세상에 너무 찌들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글이 길어졌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 읽고 리뷰를 쓰게 되면 좀 더 정제된 한 편의 "자유"에 관한 내 생각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이 책 읽어보시지 않으셨다면 꼭 한 번은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 브런치 작가 김경태 -


#그리스인조르바 #니코르카잔차키스 #독서의맛 #추천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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