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Y 7 | 홀로서기에 관하여...
오랫동안 경쟁을 하고 살아왔다. 어쩌면 지금도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경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글”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원칙인 세상이다.
시작은 “잘하고 싶다”라는 순수함이었다.
내 앞에서 나를 지켜봐 주는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친구, 선생님, 동료, 선배, 후배, 그 외 많은 지인들. 그들과의 관계 속에 나라는 존재감을 드러낼 방법은 “잘하는 것”이었다.
무엇(what)이라는 목표도 중요했지만 사실 서술어인 “잘한다”가 더 중요한 가치로 다가왔다.
돌이켜보면 항상 잘하고 싶었다. 그런데 매번 안타깝고 좌절하는 순간을 만났다. 그건 바로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했기 때문이다. 잘한다는 것과 잘하고 싶다는 것 사이에서 경쟁은 시작되었다.
고1 때 담임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희들 1학년 때는 싸움 잘하는 놈이 제일 부럽고, 2학년 되면 여자 친구 예쁜 놈이 제일 부러울 거다. 근데 고3 되면 어찌 되는 줄 아나? 고 3 되면 공부 잘하는 놈이 제일 부럽게 된다. 이건 그 시간을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다. 지금 내가 하는 말 잘 새겨들어라. 그리고 학생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봐라.”
대학 입시를 한창 준비하면서 이 말이 진리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순위로 매겨진 성적표를 받아 들고 우리는 또래들과 유한 경쟁을 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고등학생 시절을 넘겨 대학을 와서 보란 듯이 경쟁을 끊어버렸다. 목표가 대학 입학이었던 학생에게 그 관문을 통과한 후의 삶은 목표를 잃어버린 삶이 아니라 자유하는 삶이었다.
나는 방종 같은 자유를 누렸다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돈에 기댔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삶이 아닌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딱 2년을 그렇게 살아봤다. 그리고 다시 경쟁하는 사회로 복귀했다.
2년의 기간은 내게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언급한 “자아의 알을 깨는 기간”이었던 것 같다. 태어나면서 떼었다고 생각했었던 탯줄이 사실은 내 정신의 언저리에 여전히 붙어있었다. 그것을 떼어내는 일 자체가 방황이었고 갈등이었고 불안이었다.
나는 세상 걱정 없는 사람처럼 천하태평하게 누리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사실 엄청나게 불안했다. 부모님의 우산을 벗어나 직접 내 손으로 우산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또, 그 우산 속에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채우고 그와 함께 만들어갈 삶을 상상하는 것이 무서웠다. 돈을 벌고, 직업을 얻고, 쌀을 사고, 밥을 짓는 것이 더 이상 타인의 일이 아닌 내 일이 된다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더욱 철저하게 나는 내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 기간이 그랬다.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책을 읽고, 오락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하고, 잠을 잤다. 철저하게 2년간 이렇게만 살았다. 그 시간 동안 학생이라는 본분을 망각한 채 살았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서서히 그리고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2년의 끝에 입대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펑펑 울어본 날이 아마도 부모님과 누나가 훈련소 퇴소식에 오신 날 일거다. 신병 훈련을 받는 중에 부모님 얘기만 하면 다들 많이 울던데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날 멀리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정말 통곡하듯 울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내 정신에 붙어있던 탯줄의 마지막 끝을 잘라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막연했지만 내 손으로 무언가를 해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 같은 각오가 생겼다. 부모님이 내 곁을 떠나가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어른이 되어갔다.
지금. 내 나이 마흔다섯.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지만 점점 자유로워짐을 느낀다. 출퇴근을 하고 회사에서 일을 하며 받는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삶을 유지한다. 그래도 자유롭다. 특히 생각이 자유롭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을 많이 해본다. ‘그때 그 2년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그 시간은 지금 내 삶에 있어 완충제 같은 역할을 하고 또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시기에 자라났던 많은 생각들이 지금 내 사상에 많은 근간을 이루었고, 그때의 추억들에 따뜻하다. 그때 만났던 많은 사람들, 그때 나누었던 많은 대화와 싸움들. 경쟁을 버리고 알게 되었던 많은 새로운 관점들. 그것들이 하나 둘 모여서 지금 내 삶이 되었다.
다행이다. 지금 내가 지치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어서 말이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걷고 싶어서...
- 브런치 작가 김경태 -
#탯줄 #경쟁 #독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