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장센 : “장면 속에 무엇인가를 놓는다”라는 의미의 프랑스어
요즘 시간이 날 때면 예전에 흥미진진하게 봤던 영화를 다시 본다. 새로운 영화를 보기에도 부족한 시간에 왜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느냐라는 얘기도 많다. 하지만 감명 깊었고 흥미진진했던, 때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영화를 다시 보면 예전에 놓쳤던 것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감독의 의도가 읽히고, 소품 하나하나가 의미 있게 다가오고, 현재 유명 배우지만 그의 과거 시절 어설픈 연기력 등을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을 때 느끼는 재미보다 봤던 영화를 다시 볼 때 느끼는 재미가 조금 더 큰 것 같다.
책은 문장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는 과정이 처음 읽을 때 확실히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다시 읽을 때는 비슷한 상상을 답습하는 경향이 있어서 재미가 영화보다는 조금 덜한 느낌이다. 그러면 영화는 이미 화면으로 표현되어있는데 왜 더 재미있을까? 책을 재독하는것이 흰 도화지에서 펼쳐지는 상상의 그림에 덧칠을 하는 재미라면, 영화는 화려한 색으로 빼곡히 채워진 도화지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숨은 그림을 찾는 과정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감독이 나열해놓은 작지만 무게 있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한 번의 관람으로는 찾아내기 힘들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같은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질리지 않는 영화는 웰메이드 명작인 것이다.
아무튼 최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올드보이>를 다시 봤다. 세 번째 본 영화였고, 약 15년 만에 다시 본 영화였다. 명작이란 이런 영화를 말하는 것이겠지. 영화를 다시 보며 그동안 내가 놓치고 있던 여러 가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어서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안 보신 분은 퇴장 바람. 물론 영화의 해석은 내 마음대로 해석이다. 영화를 해석하는 영역은 맞고 틀리고 가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다시 볼 때는 스토리는 중요하지 않다. 이유는 줄거리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용의 이해보다는 장면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훨씬 집중력/흡입력 있게 감상이 가능하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아파트 옥상이다. 자살남(오광록)이 개 한 마리를 데리고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려는 찰나에 주인공 오대수(최민식)가 그의 넥타이를 잡고서 그의 낙하를 막고 있는 장면에서 영화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아슬아슬한 장면인데 순간적으로 관람객의 시선을 압도할 수 있지만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른 채 두 번의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세 번째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면서 나는 비로소 감독이 이 장면을 첫 씬으로 편집한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아주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첫 장면에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두 담겨있다고 느꼈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래알이나 바위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라는 김우진의 대사로 정리할 수 있다.
고등학생이었던 주인공 오대수는 전학 가기 전날 김우진(고등학생–유연석, 어른-유지태)과 그의 사촌누나 이수아(윤진서)가 과학실에서 벌이는 므흣한 짓(??)을 목격한다. 그리고 이사를 떠나면서 가장 친했던 친구 주환에게 자신이 봤던 것을 이야기하며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그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는다. 친구 주환의 입을 통해 그 일이 학교에 퍼지게 되면서 수아는 걸레라는 멸칭을 얻게 되고, 스트레스 때문인지 급기야 배가 불러옴을 느끼게 된다. (김우진은 상상 임신이라고 말하지만 난 아닌 것 같다는 생각임) 결국 그녀는 동생 우진과 합천댐에 놀러 가서 우진의 팔을 잡고 버둥거리다 자살한다. 그녀가 자살하는 모습이 위에서 언급한 첫 장면의 자살하려는 모습과 똑같다.
그럼 첫 장면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뭘까?
이 장면의 의미는 이어지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자살하려는 노숙자를 살려낸 오대수는 그를 붙잡아두고 자신이 15년간 갇혀있었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대수의 이야기를 경청한 노숙자는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그럼 이제 내가 왜 자살을 하려는지 얘기할게”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대수는 노숙자의 얘기를 듣지 않고 그냥 아파트 옥상을 떠난다. 오대수가 아파트를 빠져나오는 순간 노숙자가 옥상에서 떨어져서 죽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 장면이 말하는 바는 오대수는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자신의 이야기만 하고 상대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말이 중요하지 남의 얘기는 들을 생각이 없는 것, 상대가 아무리 아니라고 말하려고 해도 내 이야기만 해대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 오대수는 자신이 봤던 것을 이야기할 뿐, 상대가 변명할 여유를 주지 않았던 것과 같다. 뒷일은 나몰라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노숙자가 강아지와 함께 자살하는 장면은 아마도 우진의 누나 수아의 뱃속에 있는 생명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강아지라는 설정에 인간이 아닌 상상의 생명을 말하는 것인 가? 아니면 같은 포유류라서 실제 이수아의 뱃속에 생명이 있음을 암시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의 종반에 나오는 우진의 대사 중에 “누나를 임신시킨 것은 김우진의 자 X가 아니라 오대수의 혓바닥이었다.”가 있는데, 이 대사를 통해 나는 상상임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클라이맥스에 오대수가 가위로 자신의 혓바닥을 자르는 씬이 있다. 이 부분도 처음에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더 이상 말을 않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런데 다시 보면서 느낀 것이 오대수에게 복수하러 온 철웅(오달수)이 미도(강혜정)의 유방을 만졌다며 오대수의 입으로 “너 손을 잘라버린다”라는 대사를 하는데, 김우진은 이 말을 듣고 철웅의 손을 잘라 오대수에게 보낸다. 즉 사랑하는 존재의 육체를 탐했던 그 신체를 복수하는 방식이 “잘라내기”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오대수가 혀를 자르는 것은 김우진의 입장에서 반드시 감행해야 했던 처벌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대수 스스로 혀를 잘랐을 때 우진은 복수의 끝을 보았기 때문에 그를 놔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인간이 복수에 혈안이 되어 복수만을 위해 살아왔을 때 복수가 끝난 상황이 되면 스스로 더 이상 살 의미가 없는 삶의 목적을 상실한 모습을 표현한 것도 명확히 느껴졌다. 예전에는 “우진이 왜 자살하지?”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 의미를 알 것 같다.
이것 외에도 만두, 천사의 날개, 보라색 박스 등 많은 소품들에서 여러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었는데 이런 걸 다 기록하려면 너무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여러분의 상상에 맞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영화 <올드보이>를 한번 더 보면서 고민해보면 좋겠다.
그런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감독은 왜 [최면]이라는 기법을 이용해서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가?”라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최면인지는 잘 모르겠다. 최면은 실제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거짓 같기도 한 미지의 영역인데, 오대수에게 일어난 사건 자체가 픽션일 수도 논픽션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걸까?
상상이 꼬리에 꼬리는 문다.
아무튼 <올드보이>를 다시 보면서 그전에 읽히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읽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영화든 책이든 오락이든 내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이게 바로 상상력의 힘, 다시 말해 생각의 힘이다.
그리고, 박찬욱 천재 같다. 그의 복수 3부작 다시 복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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