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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Jan 17. 2022

페르소나 -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다

| 가면을 쓴 나 vs 가면을 벗은 나, 어느 것이 진짜 나일까?

"인간에게 가면은 필연적이다."
   - 카를 융 -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가면을 가지고 있다.

다만 그 가면이 평소 자신의 얼굴인 줄 착각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페르소나 (persona)

: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뜻한다.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인 성격을 의미한다.


최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3부작을 다시 봤다. 다시 보면서 느꼈지만  편의 영화 중 최고는 다크 나이트(Dark Knight)였다. 다크 나이트에는 두 명의 가면을  주인공이 나온다. 박쥐 가면을  배트맨과 트럼프 카드에 등장하는 조커 인형의 얼굴로 화장을  조커다.  두 명의 인간은 얼굴을 가리고 철저히 자신의 내적 본성을 가면에 기대어 폭력으로 투영한다. 본래 자신의 얼굴로는 드러낼  없었던 억압되어 있던 광기를 가면에 기대 폭발시킨다.



내용은 차치하고 이 시리즈를 감상하면서 나 자신의 얼굴에 덧씌워진 가면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얼굴은 나의 어떤 모습을 반영하고 있을까?  얼굴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태생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살면서 겪고 느낀 온갖 삼라만상에 의해 빚어진 변형된 자아() 표현하고 있는 걸까? 거울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질수록 점점 더  얼굴의 생김새는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결국 남은 것은 거울 속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나의 수많은 기억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한 가지 기억에 머무르게 되었다.


처음으로  스스로 새로운 가면을 원했던 적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나는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고 나를 아는 사람이  명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곳으로 떠나 그동안의 모든 관계를 리셋하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현재가 버거웠고 미래가 두려웠던 그때 내가 찾았던 비상구가 바로 현실 회피였던 것이다. 매우 비겁한 행동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그런 방황과 결정 그리고 행동으로 인해 현재의 내가 있다. 방황하던  시간이 내게는 좋은 보약이 되었다. 어찌보면 환골탈태할  있었던  같다.  한편 생각해보면 그때 새롭게 만들었던 나의 페르소나(가면) 결국 과거부터 영속해오던 나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었던  같다. 늑대가 호랑이가   없고, 고래가 상어로 탈바꿈할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20 , 2002 1 3 어학연수를 떠났을 , 그곳은 스물여섯 해 동안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나를 아는 사람이   명도 없는 완전히  도화지 같은 세상이었다.  스케치북을 사서 첫 장을 펼쳤을  느낄  있는 설렘이라고 표현하면  느낌이 전달될까?  


내가 걷는 , 만나는 사람들,  눈이 닿는 시선 속의 모든 것들이 완벽히 새로웠다. 나는  하얀 도화지 위에 그동안 내가 상상해왔던 내가 원하던 새로운 인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kennie"라는 영어 이름을 정했고, 영어를 못하지만 잘할  있는 존재, 똑똑하고 여유로운 인격로서의 나를 콜라주 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한걸음 한걸음이 살얼음 위를 걷듯 두려운 내디딤이었지만 매 순간 긴장 속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나를 알고 있는  하나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가는 일은 마치  태어난 아이가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물론 시행착오도 많았다. “착하고 싶다라는 도덕적 욕구와 “손해 보기 싫다라는 본능적 욕구가 충돌하기 일쑤였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얼굴과 이름을 알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나를 각인시키는 활동은 한국에서는 26년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다.  


새로운 세상이다 보니 처음에는 만나는 사람들도 턱없이 적었다. 스쿨버스 운전사, 홈스테이 주인아주머니와 그의 남자 친구, 학원의 데스크 직원 정도가 전부였다. 혼자 골방에 박혀 영어책을 펼쳐놓고  생각  생각으로 미래를 걱정하며 현재를 채웠다. 혼자서 동네  바퀴를 돌아보겠다며 호기롭게 나섰다가 백미터도  걷고 겁이 나서 다시 돌아온 적도 있었다. 혹시 길을 잃어버리면, 혹시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 말도 통하지 않고 긴급 연락처도 없는 매우 불안정한 존재였기 때문에  삶의 경계는 한없이 좁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쭈뼛쭈뼛 눈치 보며 버스를 기다리던 내가, 언제부터 당연하다는  버스기사에게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어학원에서 동갑내기 브라질 친구가 생겨 같이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일본과 대만 친구들이 생기면서 그들의 집에 초대받기도 했고 함께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고 식사를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어학원에 있는 한국인들도 알게 되었고, 이곳 대학에 다니고 있는 유학생과 교포들과도 인연이 생겼다. 4개월 정도 지났을 때 더 이상 이곳의 삶이 불편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영어를 못해도 약간의 단어와 바디랭귀지면 거의 모든 일들이 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사회에 적응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이곳에서 한국과 단절되어 완전히 새로운 인격으로 살고 있다고 믿었다. 더글러스 케네디의 소설 <빅 픽처>의 주인공 “같은 삶이라고 할까? 그때는 소나라는 단어를 몰랐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내가 추구했던 “새로운  아마도 나의 페로소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놀란 사실은 한참 동안 새롭게 조각하는 나에  빠져있던  어느 , 한국 친구들과의 저녁 술자리에서 오가던 대화에서 그들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던 나는 과거 대한민국에서 묘사되던 나와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발버둥 치며 새로운 나를 만들고 있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말과 행동에서 보이는 나는 앞선 26년의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순간 나는 약간의 해방감을 느꼈다.  조여있던 허리티가  하고 끊어지듯 인식하지 못했던 삶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게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에서 밖으로 걸어 나올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미국이라는 곳이 도피처가 아닌 안식처로 인식되었다. 그러면서 좋은 인연과 좋은 추억들을 넉넉히 쌓게 되었다.




다시 영화 <배트맨> 시리즈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끝부분에 배트맨은 죽음(?) 가장하여 세상에서 사라지고 조커도 생사여부를 알지 못한 채 끝이 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열린 결말로 관객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두 명의 주인공을 . , 로빈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켜 다음을 기약.


생각해보라.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다. 가면을 쓰고 싶어하고 가면에 기대어 억제된 본능을 표출한다. 때론 폭력으로 때론 소음이나 이상한 행동으로 자신을 옭아매던 밧줄을 끊어내려 발버둥 친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은 잠시의 방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인간도 자연의 법칙에 수렴하기에 스스로 안정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배트맨이 가면을 벗고 브루스 웨인의 삶을 살 때가 진짜 웨인삶이듯 우리도 진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오롯한 자신의 삶이 시작된다.


자, 지금 여러분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자.

지금 당신은 진짜 당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가면을 쓰고 있는가?


#배트맨 #조커 #페르소나 #가면 #자아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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