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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Apr 08. 2020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0058] 이 제목을 보고 떠오르는 친구 있으시죠?


이 제목을 보고 노래가 생각나신 분들은 X세대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고등학교 당시(1993년) 신성우의 두 번째 앨범에 수록된 곡 제목이다. 당시 그 앨범의 타이틀은 <노을에 기댄 이유>였는데 (지금 듣고 있음.... 아!! 미치겠다... 심장 두근두근) 타이틀곡 외에도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이라는 곡이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당시 나도 친구들이랑 노래방에서 어깨동무하고 한 소절씩 돌려 부르다 마지막엔 떼창했던 기억이 여러 번 있다.


오늘 내가 이 노래를 소환한 이유는 이 곡의 가사에 내가 말하고 싶은 친구에 대한 느낌이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 내가 네게로 가기보다는 네가 내게로 오길 바랬지.
해묵은 욕심 속에 말해온 너의 모습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생각만 해도 느낌이 편한 것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항상 내가 널 믿을 수 있는 것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조그만 오해도 필요치 않은 것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내 자신을 돌이켜 보는 것

신성우 2집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중에서



지금 머릿속에 친구들을 그려보면 그저 친구라고 부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것 말이다.




난 샘이 많은 편이라 여러 명의 친구들 중에서도 내가 모두의 중심에 서서 서로 간의 친분에서 항상 나를 BEST로 꼽아주길 원했다.


요런 오만한 생각


이런 건 욕심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우치게 되면서,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최고가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버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가 고등학생 때다.


내 책 <일년만 닥치고 독서> 와 <독서의맛>에서 가장 많이 차지하는 에피소드가 바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만큼 친구들은 내 가치관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초등학교도 그랬고, 중학교 고등학교도 마찬가지로 난 항상 내 옆에 단짝 같은 친구가 있었다. 물론 대학 때도 있었다. 현재 모두와 연락은 되는 상태지만 자주 보진 못하고 있다. 그나마 가장 자주 보는 녀석이 고등학교 단짝 친구 녀석이다. 이 녀석과의 에피소드는 말로 다 못할 정도로 많다.






고 1,2 같은 반 내 짝꿍이었던 녀석인데, 녀석은 우리 반에서 키가 젤 컸고 난 우리 반에서 네 번째로 작았다. (난 4번, 녀석은 46번. 총 48명인데 녀석은 끝번이 싫다며 맨 뒤에 서지 않아서 46번이 되었다) 이렇게 키 차이가 큰데 2년간 어떻게 짝꿍이 되었냐면, 녀석과 친해지면서 녀석이 눈이 안 보인다는 핑계로 내 옆자리를 달라고 선생님께 말했기 때문이다. 성적도 항상 나랑 엎치락뒤치락 했고(물론 녀석이 나를 더 많이 이겨먹었다), 고등학교 입학 배치 고사에서 전교 석차 내 앞 등을 해서 동고관 (당시 우열반)의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녀석이었다.  

알고 봤더니 나랑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3년 동안 등하교를 같이 했다. 매일 20분 정도 걸어서 학교를 다녔으니 녀석과 얼마나 많은 얘기를 했을까? 전교생과 선생님들도 우리 둘이 가장 친하다는 건 다 알 정도로 학교에서 소문난 친구였다. 처음으로 친구 집에서 잠을 자본 것이 녀석의 집이었고, 함께 서울로 대학을 와서도 주말이면 녀석의 누나 집에서 많이 얻어먹고 다녔다. 녀석과 미팅을 수십 번 했고, 서로 좋아했던 친구가 같아서 다투기도 했었다. 녀석은 여전히 큰 키와 밀가루같이 하얀 피부로 또래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나 기계공학과라는 과 특성상 동기 여자친구가 딱 1명 있었고, 난 여성들에게 인기가 그다지 없었으나 과 특성상 수십 명의 여자 동기가 있어서 항상 여자친구들과 같이 다녔다. 그래서 녀석이 우리 학교에 자주 놀러 왔다.


1996년 12월 녀석을 논산 훈련소에 보내고 너무 마음이 아파 처음으로 담배를 피워봤었다. (물론 담배는 내게 맞지 않아서 별로 피우지 않고 끊었다.) 3개월 뒤 내가 입대를 했고, 편지를 통해 휴가 날짜를 맞춰 부산에서 얼굴을 보고 술을 마셨다. 제대 후 녀석과 함께 두 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함께 했었다. 내가 휴학과 해외 연수로 자리를 비운새 녀석은 취직을 했고, 내가 마지막 대학생이었던 시절 녀석이 돈을 번다는 이유로 삼겹살을 참 많이도 얻어먹었다.


녀석과 내기하듯 한국 문학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태백산맥을 읽으면, 녀석은 한강을 읽었다. 내가 판타지에 미치면 녀석은 무협지를 읽어대는 꼭 같은 걸 보진 않았는데 비슷하게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녀석과 함께 본 영화도 백편은 넘는 것 같다. 고등학생 때는 부산 남포동에서 부산극장, 대영극장, 부영극장, 제일극장을 드나들었고 서울에 가서는 명보, 피카디리, 단성사, 서울극장, 대한극장을 들락거렸다. 음악에 대한 호기심도 비슷해서 푸른하늘, 공일오비, 신해철, 이승환, 오태호, 박정운, 김건모 같은 당대 유명했던 가수들의 CD를 사서 나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 녀석은 일산에, 나는 천안에 살고 있다. 그렇게 매일 한 몸같이 뒹굴어대던 녀석인데 이제는 분기에 한번 보는 것도 힘들다.




이젠 친구가 무언지 조금은 알만한 나이가 되었다. 생각만 해도 얼굴에 슬몃 미소가 생기고, 스스럼없이 전화번호를 누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친구다. 책 출간했다며 10권을 강매시켜도 웃으며 받아주는 게 친구다. (^^) 이제는 부모님과 가족을 먼저 챙겨야 하는 가장이 되었지만 10대와 20대 그 오랜 시간의 축적된 힘은 우리가 함께할 인생을 끝까지 완주하게 만들 넉넉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다.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바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다는 생각”을 미치도록 공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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