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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Apr 14. 2020

지금 생각나는 친구 있나요?

[0065] 나에게 친구는...



오늘 주제를 앞에 두고 친구들을 여럿 떠올려보았는데 오늘은 대학 때 만났던 친구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내겐 참 고마운 친구들이다.





녀석들을 만난 건 1996년이다. 당시 난 대학교 2학년이었지만 두 학기 모두 유급을 당해서 다시 1학년 수업을 듣게 된 망나니 시절의 이야기다. 96학번 새내기(??)들이 입학해 봄날 캠퍼스에는 싱그런 기운이 가득했다. 95학번까지는 학과로 모집해서 우리 과의 정원은 115명이었는데, 96년부터는 학부로 모집해서 정원이 320명으로 늘었었다. 동기생들 중에도 말을 섞어보지 못한 녀석들이 있었는데, 320명의 후배는 그들이 내 과 후배인지 인식하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교정의 잔디밭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캐치볼을 하고 있는 네 명의 남자를 보게 되었다. 걸어가다 보니 녀석들에게 다가가게 되었고, 그중 한 녀석은 부산의 고등학교 친구의 친구였다. 녀석은 재수를 해서 96학번으로 같은 학교 같은 학부에 입학을 했던 것이다. 그때 거기서 고향 친구라며 같이 캐치볼 하던 친구들을 소개해 주면서 우리들은 친구가 되었다.


캐치볼을 하던 네 명은 모두 같은 과였고 모두 재수생들이었다. 즉, 신입생들과 95학번 사이의 주류에 잘 어울리지 못하는 녀석들이었다. 나이도 같고, 몇 마디 해보니 나랑 잘 통하는 듯해서 그날 바로 친구 먹었다. 그리고 내 대학시절 학교생활은 녀석들과 파란만장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녀석들 중 가장 키가 작았던 녀석은 인천이 고향이라 매일 인천에서 2시간가량을 전철로 통학하고 있었다. 또 한 놈은 서울, 한 놈은 분당, 한 놈은 기숙사, 나는 기숙사에 짐만 맡겨두고 친구 집에서 생활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우리는 학교에서 매일 같이 다녔다. 녀석들은 인상이 비교적 험악하고, 싸움도 잘할 것 같이 생겨서 주변 동기들이 말을 잘 못 붙이는 그런 부류였다. 그 네 명 사이에 내가 끼게 되면서 분위기는 아주 노릇노릇해졌다. (내 생각)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술을 마시고, 같이 당구를 치고, 같이 미팅을 하고, 같이 소개팅을 하고, 같이 잠을 자고. 집에서 통학을 하는 녀석들은 주 중에는 친구의 방에서 숙식을 시작했고 그렇게 우리는 마치 한 몸처럼 매일매일을 붙어 다니며 1학년(나는 다시 1학년)의 자유를 만끽했다. 작은방에 가득 이불을 깔아놓고 들어오는 놈들 족족 한쪽 끝부터 채워가며 포개어 잠을 잤고, 어느 날 만취한 녀석이 실수라도 하면 짜증을 내도 함께 이불을 빨며 웃었다. 술값이 모자라 신청한 토익시험 수험 표를 이모님께 건네며 3만 원짜리인데 대신 시험 보러 가고 술 좀 더 달라고 소리 지르기도 했고, 5000원짜리 순대 한 접시 시켜놓고 어묵 국물을 10번도 넘게 리필해 먹다가 보다 못한 이모께서 돼지 불고기 한 판을 그냥 주시기도 했다.


매달 초에 용돈을 받던 녀석들에게 주차별로 용돈을 나눠 받자며 제안을 했고, 그래서 우리는 비교적 허덕이지 않고 한 놈의 한 달 용돈을 매주 탕진시키며 그렇게 그 시절을 보냈다.



그리도 녀석들은 시험 기간이면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난 공부가 싫어서 만화방에 무협지를 잔뜩 빌려 녀석들 공부하는 열람실에서 밤새 책을 읽었었다. 고등학교까지 해보지 않았던 커닝을 그때 처음으로 해보았고, 녀석들보다 내 성적이 잘 나오자 녀석들이 한탄을 했던 순간은 잊히지 않는다. 시험기간 함께 샤워하다 내가 코피를 흘릴 적이 있었는데, 녀석들이 ‘네가 뭘 했는데 코피가 나냐?’며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



녀석들과의 1996년 1년은 정말 꿈같았다. 그해 겨울 눈이 많이 내린 어느 밤, 우리는 기말고사를 마치고 곧 다가올 군 입대를 앞두고 잠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그때. 바깥에 나가 추억사진 남기자며 모두 밖으로 뛰쳐나갔다. 편의점에서 1회용 카메라를 구입해 어두운 밤 학교 교정의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가며 셔터를 눌러댔다. 함께 눈싸움을 하며 눈밭에서 뒹굴었다. 혹독한 추위도 우리의 즐거움을 비켜간 듯했다.



1997년 한 명을 제외한 우리는 모두 비슷한 시기에 군대를 갔고, 녀석 중 한 놈은 상무대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을 때 내 다음 차수로 와서 초코파이 나눠먹으며 즐거워했던 추억이 있다.



그렇게 3년을 보내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을 때, 한 녀석은 일찍 복학해 3학년이 되어있었고, 한 녀석은 늦게 군대가 아직 제대가 1년이 남아있었다. 또 한 녀석은 의대를 가겠다며 자퇴를 하고 노량진으로 갔고, 나머지 한 녀석은 나랑 같이 2학년으로 복학했다.


이제 조금은 책임감이 생긴 녀석들은 좀 더 공부에 집중해갔고, 난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들을 반겼다. 매일 하던 술자리가 일주일에 한두 번으로 줄었지만, 시간은 여전히 길고 깊었다.



녀석들과의 수많은 대화 속에서 난 내 인생의 방향을 가늠했던 것 같다. 내 고등학교 친구 녀석들은 대부분이 부잣집 도련님들이었지만, 이 녀석들 중에는 집이 어려운 친구도 있어, 당시 방종 같은 자유를 갈구하던 나는 녀석들에게서 많은 잔소리를 들었다. 그중 대표적인 얘기가 “군대를 다녀와도 정신을 못 차렸네!”라는 말이었다.


밤을 새워가며 녀석들과 미래의 모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부딪치며 생각을 토로했고, 살아온 환경이 전혀 다른 녀석들의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내가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었다.






지금 녀석들과는 일 년에 한 번 만나기도 어렵다. 연락처는 알고 있고, 명절이면 문자를 주고받는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만나면 곧바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마약 같은 공감된 경험이 존재하고, 내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친구로 자기 매김하고 있다.


내가 책을 썼다는 소식에 학창시절 공부 안 하더니 왜 뒤늦게 지금 그러냐며 축하를 해왔고, 사람 변하면 죽는다던데 어디 아프냐며 반갑게 연락을 해왔다.


너스레 떨며 몇 번의 문자가 오갔지만 그 문자들 사이에 서로의 마음이 고스란히 비쳤다.


그래 우린 여전히 친구다.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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