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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존재에 대한 각성 (약점과 강점에 관하여)

매번 다른 존재이고 싶었지만 사실 모두 같은 존재이길 바랐다.

by 김경태


자격지심 덕분에 매우 힘들었던 적이 있었다.

무언가 해보려고 해도 항상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내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노력의 질과 양이 부족했던 시기였다. 가장 가까운 부모님이나 누나, 친구에게도 말 못 하고 끙끙 앓았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누나에 대한 기억이다. 적어도 내게 누나는 완벽한 존재였다.

두 살 터울의 누나는 뭘 해도 잘하고 칭찬을 받는 존재였다. 아빠 엄마는 누나가 자신의 딸인 것을 너무나 뿌듯해했다. (아마 지금 내 아들이나 딸이 그렇게 성장하게 된다면 내 어깨도 한껏 넓어지지 않을까?) 난 뭘 해도 누나보다 못했다. 내가 구구단을 못 외워 주산학원에 가기 싫어 아프다 핑계를 댔을 때, 엄마는 내 손을 붙잡고 학원 선생님께 찾아가 아이가 누나보다 좀 부족하긴 해도 열심히 하려고 하니 너무 윽박지르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매번 받아쓰기에서 “앉아”와 “않아”를 틀려서 60점을 간신히 넘길 때도 누나는 받아보지도 못했던 점수를 받아들고 집에 간다는 것에 크게 상심했었다. 누나는 어딜 가도 두각을 나타내는 존재였고, 나는 누나의 존재감을 빌어 그녀의 동생이라는 입지로 자리했다.



비단 누나로 시작되었지만, 내 삶 속에서는 계속 누나의 자리를 대신하는 누군가가 존재했다.
그런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날 때마다 나는 주눅이 들었고, 그와 친해지려 애썼다. 그를 이겨낼 수 없다면 그를 통해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나의 생존전략이었다.

나이가 들어 조금씩 내 자아가 완성되면서 나는 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품을 떠나긴 했지만 경제적 지원은 받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그 시기의 나는 나를 여러 가지로 실험해보게 되었다. 생면부지인 사람들 사이에 자꾸 나를 끼워 넣어 새로운 나를 만들어보는 일종의 페르소나(가면을 쓴 인격)를 시도했다. 수많은 미팅과 소개팅, 모임에서 매번 새로운 존재로 타인에게 나를 각인시켜보려 노력했고, 그 덕분에 오랜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친구들이 “저 친구는 널 너무 모르는 것 같다.”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매번 다른 존재이고 싶었지만 사실 모두 같은 존재이길 바랐다.

나는 내가 “능력이 있는 사람”이길 원했고, “나라는 존재만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이길 기대했다. 내가 이걸 깨닫게 된 것은 내 오랜 동창 녀석들과의 잦은 술자리에서였다. 그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를 봐오던 친구들이라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우리 집, 내 성격, 심지어 우리 집에 숟가락 몇 개 있는지까지도 알던 녀석들이었다. 비단 그 녀석들과의 자리에서도 나는 몇몇 잘난 녀석들 덕분에 주눅이 들곤 했다. 그런 녀석들이 파악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내가 각인시키고자 노력했던 나(I)를 여지없이 벗어나 있었다.

녀석들은 내 무모한 노력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본래의 너로도 충분하니 그만 “가면 벗어라”라고 말한 녀석도 있었다. 녀석들은 본래의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지금의 나로도 충분하다고 했다. 그들과의 사이에서 본래의 나(nature born 김경태)로서 충분히 존재감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내 자아를 조각하지 않으면 예전의 한없이 부족한 나로 돌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하지만 시간은 점점 나와 내 페르소나를 하나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판단했던 내 약점들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았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게 나의 처세술이 되었다.

둘의 주장이 강해 사사건건 부딪치는 문제에서 내가 끼어들면 유연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리더보다는 서포터로서의 역할이 많았기에 타인의 말을 듣고 해석하는 능력이 좋았다. 이건 회사에서도 동료들이 손에 꼽는 내 능력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통솔하기보다는 그들의 의향을 파악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게 만드는 일종의 꼬시기 능력이 생겼다. 어떤 말을 들어도 나를 무너뜨리지 않을 정도의 자존감이 생긴 것도 과거의 나를 스스로 너무 많이 무너뜨려봤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 외에도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을 통해 내 강점을 만들어낸 것 같다. 어릴 때 이런 고민을 했던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

지금 나는 점점 리더가 되어가고 있다. 항상 입어보고 싶었던 옷이지만 맞지 않는 옷이라고 생각했는데, 서서히 몸에 옷이 맞춰지는 것 같다. 어느덧 나는 예전에 그렇게 되고 싶어 하던 “존재만으로 충분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난 약점을 극복하려는 삶으로 시작했지만, 지나고 보니 내가 생각했던 약점은 약점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나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오랜 시간을 쓴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스스로 나를 컨트롤할 수 있는 영역에 내 에고와 이드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내 삶에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아마도 차원 높은 희망에 대한 바램과 현재에 만족하는 삶 사이의 내 포지션이 아닐까 한다. 즉, 계속 피곤하지만 노력하는 삶을 살 것인가? 적당히 피곤하며 적당히 노력하는 삶을 살 것인가? 그냥 이 수준에서 머무를 것인가?

난 내가 어떤 길을 갈지 알지만, 그 반대 급부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의 삶 속에 내 존재가 크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나만 생각할 수 없다. 물론 내가 가고 싶은 길의 끝에도 언제나 그들이 존재하며 그들이 없다면 내 모든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건 누군가가 얘기하는 얼마를 벌어야 한다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의미 있는 삶”에 관한 문제이며, 그 의미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자리에서 함께 빛이 날 때 비로소 완전해진다.

어렵고 고단한 일이지만 그래서 더욱 가치 있는 일이다.

- 작가 김경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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