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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후루 Dec 23. 2015

검은 비닐봉지


대학 신입생 때 이야기다. 난 새마을호를 타고 상경해 신촌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하숙집을 낮에 구하는 바람에 그곳이 유흥가임을 이사한 첫날 밤에야 알 수 있었다. 심란하게 화려한 네온사인들과 하트로 가득한 모텔들에 둘러싸인 곳이었다. 그 덕분에 밤이 되면 낡은 나무 창틀의 불투명 유리창이 핑크빛으로 물들었는데, 몽환적으로 일렁이는 색채가 왠지 야릇하게 느껴져 싫지만은 않았다.


하숙집은 일 층에 중국집이 있고, 이삼 층엔 고시원이 있는 건물의 사오 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오 층은 주인댁의 주거 공간과 하숙 겸용이었고, 사 층은 오로지 하숙용이었다.


사 층의 현관 바로 옆에 있던 내 방은 사다리꼴 모양이었는데, 뾰족한 모서리 부분을 활용하기가 참 난감했다. 건물들이 왜 직사각형으로만 지어져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후줄근한 하숙집에 어울리지 않게 내 방 앞의 거실엔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오래 묵은 커다란 호박이나 대추 술 같은 걸 올려놓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가끔 소리가 나긴 하는지 궁금해 건반 하나를 슬쩍 눌러보기도 했다.


나와 같은 층에 친구 사이인 여자 둘이 지내고 있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둘 다 유치원 선생님이라고 알려 주었다. 물론, 내가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하숙집의 반찬들로 점심 도시락을 싸다녔는데, 가끔 출근이 늦었을 땐 주인아주머니가 대신 싸주기도 했다.


개어 놓은 이불 위로 햇살이 나른한 어느 봄날. 방문 밖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곡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리가 너무나 감미로워 저절로 등이 벽에 뉘어지고 눈이 감겼다. 그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정수리부터 시작해서 머리 전체에 퍼져가던 그 묘한 감각. 소름 돋는다고 하기엔 무척 따뜻하고, 설렌다고 하기엔 무척 평안한 기분. 본 적도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 연약한 손으로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피아노 연주를 그렇게 가까이서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난 누가 연주하는지 궁금해 문을 살포시 열어 보았다. 유치원 선생님 중 한 명이었다. 혹시 나를 보고 연주를 멈출까 봐 소리도 내지 않고 문을 빨리 닫았다. 그리고 개어 놓은 이불에 기대어 벽지에 양각으로 새겨진 촌스러운 꽃무늬들을 만지며 연주가 끝나지 않기만을 바랐다.




하숙집에는 주인댁 큰딸의 남자친구도 함께 살고 있었다. 원래 이 집의 하숙생으로 들어와 큰딸과 눈이 맞은 거라고 했다. 그는 이미 그 집의 사위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였는데, 하숙집의 여러 가지 소일들을 도와주었다. 내 방의 컴퓨터가 고장 나면 고쳐주기도 하고, 형광등을 갈아주기도 했다. 직업은 따로 있는 것 같았는데 뭐였는지는 모르겠다.


한 날은 주인댁에 손님들이 제법 찾아와 안방이 어르신들로 북적거렸다. 난 바로 옆 부엌에서 저녁을 먹는 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모습과 말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큰딸과 그 남자친구도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때 오가는 대화를 듣고 둘이 곧 결혼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허. 이제 평생 하숙집을 얻게 되었구먼!"

한 어른이 호탕하게 웃으며 던지는 농담을 듣고, 그 남자친구가 머쓱하여 뒤통수를 긁적긁적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내 맘을 아프게 했다. 그런 경솔한 농담을 던지는 어른이 얄미웠다. 안 그래도 그 남자친구가 눈치를 보며 지내는 것 같았는데, 그 얘기에 눈치가 한 바가지 더 보였을 것이다.


모텔가에 살면서 다양한 것들을 봤지만,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시간도 희미해지는 깊은 밤이었다. 누워 있어 봤지만, 잠이 오지 않아 이불을 차고 일어나 한숨을 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취객들도 사라지고 거리는 조용했다. 사람 한 명이 서 있는 게 보였는데, '언덕 위의 하얀 집'이란 이름의 작은 모텔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몸매나 입은 옷을 봤을 때 이삼십대의 젊은 남자 같았다. 그의 손엔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들려있었다.  


그는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던지는 동시에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렇게 그는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잠시 보다가 하늘도 잠시 보고 바닥도 잠시 보며 연신 담배만 피워댔다.


대여섯 개비를 연달아 피운 그는 검은 봉지 안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언덕 위의 하얀 집에 눈길을 한 번 슬쩍 주고 어디론가 걸어가 버렸다.


난 왠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비닐봉지가 불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며 그 남자가 서 있던 곳을 보니 담배꽁초들이 한가득 떨어져 있었다. 볼품없어진 그 꽁초들엔 말보로라는 상표가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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