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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후루 Nov 12. 2015



혹시 삥을 뜯겨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네. 그 삥이요. 동네 형아들이 조용히 다가와 급전을 땡겨가는 행위 말이에요.


전 어릴 적에 참 많이도 삥을 뜯겼지요.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길을 걷다 뭔가 '쏴'한 느낌이 들면 어김없이 누군가 어깨동무를 해오곤 했지요.


그럼 시커먼 교복의 그 형아들은 저의 주머니 사정을 궁금해하였고, 숨겼다가 걸려서 나오는 금액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은 어떻게 되는지도 친절히 알려주었지요.


간혹 아주 상냥한 형아들은 빌려달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지금 돈을 뺏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하여, 제가 뿌듯함을 느낄 수 있게 배려해주었지요.



그래도 한 번은 저도 용감하게 위기를 돌파한 적은 있었습니다. 어느 공터 앞을 지나가는데, 호쾌한 분위기를 풍기는 누님들이 철재와 벽돌, 목재들을 의자 삼아 자유롭게 앉아 계시더군요.


그때 '어이~! 헤드!'라며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전 저를 부르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헤드'라는 브랜드의 가방을 메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전 못 들은 척하며 고개는 절대 돌리지 않은 채 조금 빠르게 걸었습니다. 그러자 한 분이 '야! 씹냐?!'라는 질문을 건네었고, 대꾸하면 더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전 그저 발걸음의 속도만 높였습니다.


저의 빠른 판단 덕분에 서로에게 아무런 피해 없이, 일이 잘 해결될 수 있었지요.




그런데 한 번은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회란 참으로 냉혹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준 사건이었지요.


학원비를 내는 날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것 같네요. 중학교 공부를 준비하려고 '성심학원'이란 곳에서 영수 과목을 수강하고 있었습니다.


학원비는 큰돈이기에 전 책가방의 파일 속에 돈을 숨겨 만반의 준비를 했지요. 그리고 책가방의 끈을 양손으로 꼭 잡은 채 긴장감 속에서 학원을 향한 여정에 올랐습니다.


험난한 여정이 중반으로 접어들 때였습니다. 가장 위험한 사건 다발 구역에 들어선 순간이었지요. 바로 그때, 빨간 아디다스 츄리닝 상하 세트로 스포티룩을 연출한 형아와 갈색 스웨터로 프레피룩을 연출한 형아가 저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인사말처럼 돈이 얼마 있는지를 물었고, 전 주머니에 있는 동전 몇 개를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그 형아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정말  그것이 전부인지, 뒤져보고 돈이 나왔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소상히 알려주었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전 그 순간 절대 해선 안 될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가방의 학원비 말고는 이게 다예요.'라는.


네. 맞습니다. 정말 바보 같았지요.


전 학원비니까, 아주 중요한 돈이니까 그 형아들이 뺏어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물론, 돈을 숨긴 것이 걸려 더 큰 보복을 당하게 될까 봐 그런 부분도 있습니다만, 그때 제가 워낙 순진하고 착했던 거겠지요.


그 형아들도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저의 믿음에 화답을 한 듯이 형아들은 아주 격한 반응과 함께 저를 아늑한 골목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제야 전 '아. 내가 괜한 소리를 했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아. 그러고 보니 깜빡하고 학원비를 안 가지고 나왔네."라는 신빙성 없는 변명을 구사했지요.


한 형아는 저를 꼼짝 못 하게 벽에 붙여놓고, 다른 형아가 아주 빠른 속도로 저의 가방 속을 샅샅이 탐색하였습니다. 전 겁이 나서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하지도 못했지요.   


결국, 파일마저 굴복하여 학원비를 뱉어내고야 말았습니다. 형아들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돈을 들고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이리저리 널브러진 가방과 책들 옆에 털썩  주저앉은 저의 심정은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눈물이 났지요.


'아. 큰일이다. 이걸 어떡하나.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나.' 하며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겨우 짐을 추슬러 골목 밖으로 나갔습니다. 고맙게도 주머니의 동전은 가져가지 않아서, 공중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머니에게 학원비를 빼앗겼음을 알리자, 일단은 수업에 늦으면  안 되니 학원에 가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가 와서 학원비를 내주시고는 제게 그 형아들의 인상착의를 물어본 후, 바람처럼 달려가셨지요. 아버지가 차를 타고 여기저기 추적해보았지만, 그 형아들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감사하게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되었다며 저를 혼내거나 하시진 않았습니다.


그런 부모님께 제 입으로 '가방에 학원비가 있다'고 한 것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돈이 없다고 했지만, 그 형아들이 강제로 나의 가방까지 뒤진 것'이라며 상황을 재해석하고 말았지요.


누나가 조금 미심쩍다는 반응을 보이긴 했지만, 어쨌든 부모님은 더는 캐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아직도 부모님에겐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아. 요즘엔 안뜯깁니다. 걱정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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